[신영복론] 신영복 한글 서예의 사회성 연구

申榮福 한글 書藝의 社會性 硏究 원광대학교 서예문화학과 김성장 석사학위논문(2008) I. 서론 신영복(1941~ )의 書藝는 동양 고전의 사상과 철학을 바탕으로 탄탄한 이론적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과, 사회 운동의 이념을 서예 형식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文字香書卷氣를 기본으로 삼던 서예 전통의 복원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書藝術에서 간과되었던 사회변혁의 감수성을 서예의 기법으로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法古創新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신영복의 독특한 한글 서예는 책의 제호, 비문, 현판, 서화 달력, 상품 로고, 상업적 목적의 간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 생활에 파급되고 있으며 일부는 관공서와 공공의 장소에서 대중들과 친숙해져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글씨를 배우려는 자발적 모임이 지속되고 있고 그 결과들이 전시된 바 있다. 書論의 부재 속에 난립하는 공모전과, 대중과의 단절이 심화되어가고 있는 서단 현실을 생각해 볼 때 신영복의 서예 활동은 해방 이후 한국 서예사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김은숙은 「신영복의 삶과 서예관에 관한 연구」1)에서 신영복의 삶을 꼼꼼히 살피고 그의 서예관이 형성된 과정을 분석하였다. 그러나 신영복이 살아온 시대의 저항 정신과 민중적 감수성이 어떤 관련이 있으며 서예 형식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분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논문은 신영복의 서예 중 한글 서예의 내용과 형식 미학에 대해서 분석하고자 한다. 2장에서는 관계론을 중심으로 한 예술론과 서예론을 살펴보고 신영복 한글 서예가 탄생한 배경과 신영복의 학서 과정을 살펴본다. 3장에서는 신영복 서예의 중요한 목적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라고 보고 그가 추구하는 사상의 경향을 분석한다. 아울러 서예 기법을 기필과 운필의 특징, 장법 결구 등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그의 사회변혁적 감수성이 어떻게 서예 형식으로 구체화되었는가를 살핀다. 4장에서는 신영복 한글 서예가 사회적으로 파급되는 현상과 그의 한글 민체의 탄생 배경이 된 사회 역사적 상황을 검토하고 시대 정신과의 상관성을 분석하고자한다. 이와 함께 서단과 세간의 평가를 다루고자한다. 기존 연구가 부족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인터뷰를 통한 평가를 첨가하였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신영복이 서예 역사상 기존에 없던 민중적 정서를 표현했으며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한 흐름인 민주주의 또는 ‘저항의 시대정신’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활동이나 서예 활동이 현재 진행형이라서 그 성과를 총체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점은 본 연구의 한계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신영복에 대한 연구가 일천하다는 것 또한 본 연구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이다. 이러한 한계는 신영복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의 축적과 함께 앞으로 극복되어야 할 과제라 하겠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도 본 연구는 신영복의 서예 활동이 시사하는 사회적 含意를 밝히고 그가 성취한 예술과 시대정신의 통일에 대해 가치 있는 의미부여의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II. 예술론과 한글 서예의 형성과정 1. 예술론 신영복의 서예2)를 알기 위해 그의 예술론을 정리해보기로 하자. 예술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이는 그의 예술론의 바탕이 된 사상이 그의 삶과 시대 상황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그의 사상의 핵심은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3)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럽 근대사가 존재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를 관계론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론이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라면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 존재하며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 관계론적 구성원리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당면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 과정에 나온 그의 결론이다. 신영복을 삶을 이야기할 때 혁명가로서의 삶을 중시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혁명 운동가로 활동하다가 감옥에 갔고 20년을 복역하였다. 체포되었을 때 그는 군인이자 육군사관학교 교수였다. 그의 체포 이유는 반국가단체 구성4)이었다. 신영복이 사회주의 노선의 통일혁명당의 조직원이었다는 것은 그가 가진 당시의 사상을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쓴 석사 논문5)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바탕으로 사회를 분석하였다. 독재 권력에 대한 반대 운동의 차원을 넘어 국가의 체제를 바꾸고자하는 혁명운동6)이었던 것이다. 사형 언도의 극단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가 무기수를 거쳐 감형과 출감에 이르는 그 과정이 혁명가로서의 삶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신영복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바로 이 혁명 운동 과정의 산물이다. 둘째, 학자로서의 삶이 있다.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투옥 전에 그는 경제학자로서 대학 강단에 섰고, 출옥 후 성공회대학교에서 역시 경제학 교수로 18년을 재직하였다. 성공회 대학에 있는 동안 그는 경제학과 한국 사상사를 강의하는 한편, 자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공부한 동양 고전의 지식을 바탕으로 동양 철학을 강의하였으며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강의'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詩經', '周易'등 중국 고대의 문헌과 춘추전국시대에 성립된 '論語'와 '孟子'를 비롯한 동양의 고전을 이 시대의 역사적 과제를 성찰하는 입장에서 해석학적으로 분석하였다. 이런 경우 그는 한학자7)이자 사상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저술 활동은 전공분야라는 틀에 매여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축적과 실천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대의 특성과 역사적 과제를 문명사적으로 정리해내고 있는 인문학자이자, 시대의 지성8)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그 학문적 온축을 유려하고 詩적인 문장으로 표현해내는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하다. 셋째, 혁명가와 학자라는 이 두 축에 예술가의 모습 즉, 書道人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분리되어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어느 한 가지를 전문적으로 한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그에게 혁명과 학문과 예술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어야 하고 하나였기 때문이다.9) 이러한 삶과 사상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신영복 예술론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의 예술론은 첫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기본적인 관점이 나타나 있다. 그가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엽서에 간단한 그림과 붓글씨를 곁들이는 예가 종종 있었는데 이것 자체가 그대로 예술론이다. 편지 글의 내용을 통하여 예술과 서예에 대한 생각을 풀어 놓기도 하였다. 이후 그의 예술론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제시되었다. 그의 저서와 인터뷰 등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는 예술론의 주요 특성 그리고 시대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신영복이 예술을 인간 수양의 한 부분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신영복 예술론의 전제로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기본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자획의 모양보다는 자구(字句)에 담긴 뜻이 좋아야 함은 물론, 특히 그 사람이 훌륭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작품과 인간이 강하게 연대되고 있는 서도(書道)가, 단지 작품만으로 평가되는 인간 부재의 다른 분야보다 마음에 듭니다. 좋은 글씨를 남기기 위하여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상식이 마음 흐뭇합니다. 인간의 품성을 높이는 데 복무하는 예술과 예술적 가치로 전환되는 인간의 품성과의 통일이, 이 통일이 서도에만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근묵자(近墨者)의 자위이겠습니까.10) 이 글은 書에 대한 인간적 관점이 배어있는 의견이라 할 수 있는데, 신영복이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書藝보다 書道라는 말을 선택하여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11) 단지 작품만으로 평가되는 극단적 경향을 예술 지상주의라고 할 때, 바로 書에서 藝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에 나타나는 문제를 염두에 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글씨란 타고나는 것이라는 세간의 믿음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발언에서 확인되듯이 신영복에게 예술이란 오히려 巧를 벗어난 것이어야 하며 혼신의 힘과 정성으로 빚은 단련의 미12)가 더 소중한 것이라고 본다. 인간과 예술의 통일, 예술의 體化, 이것이 신영복 예술관의 핵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씨를 글씨로만 쓰는 것은 寫字官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상품화된 書藝란 아예 書道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人格과 學問의 온축이 그 바닥에 깔리지 않는 글씨는 글씨일 수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스승의 인격과 서예관이 신영복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13) 추사가 말한 문자향서권기의 예술관이 그 제자들의 맥을 타고 신영복에게까지 이르렀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14) 이와 같은 신영복의 예술관은 전통적으로 동양의 예술관에 맥이 닿아 있다고 하겠다. 동양에서 예술은 인간이 가야할 바른 길에 동반하는 부차적 개념으로 기능해왔다. 朱子의 眞善美 개념에서도 ‘진정한 정감으로부터 나온 작품은 좋은 작품이고, 거짓된 감정으로부터 나온 인위적으로 조작된 작품은 결코 좋지 않은 것’이며, ‘문학과 예술이 인간 심성에 미치는 영향과 수양의 도구로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윤리적 美’라 할 수 있다. ‘문학과 예술 창작에 전념하는 것, 특히 글을 수식하는 것을 ‘文’의 방법으로 삼는 것에 동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극히 혐오’15)했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공자가 말한 ‘仁의 具現態로서의 예술’16) 또한 같은 맥락이다. 신영복은 그의 스승이 서예가라는 말을 싫어한 사실을 상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阮堂·圓嶠만 보더라도 서예가이기 이전에 모두가 먼저 뛰어난 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退溪 李滉, 栗谷 李珥, 尤庵 宋時烈, 孤山 黃耆老 등 우리나라의 명필은 어김없이 학자이고 처사였다…서예는 예부터 6예의 하나로 기본적으로 '인간학'이라는 것이었다.17) 신영복이 추구하는 예술의 방향이 인간중심적 관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다음으로 신영복의 저서와 인터뷰를 통해 발견되는 중요한 특징은 그가 인간중심 예술관의 연장선상에서 예술의 사회적 메시지를 펼쳐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신영복은 서예를 사회적 발언의 매개체로 본다. ‘수단으로서의 예술관’이라 할 수 있다. 인격과 예술 활동을 등가로 보는 그의 예술관에 이미 암시되어 있듯이 그의 예술론은 예술 행위를 하는 주체, 즉 예술가가 발 딛고 서 있는 사회적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중시한다. 예술가는 사회적 역할을 해야하며 따라서 예술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산물이거나 그 시대정신의 첨단의 자리에 서 있어야한다. 예술은 고매한 취미가 아니며, 과시욕이 될 수도 없고, 우아한 사치일 수는 더욱 없다. 더구나 지식인이 사회적 과제를 붙안고 고민하는 자리에서 당대의 첨단 메시지를 담아내지 못하면 진정한 예술은 탄생할 수 없다. 예술을 통하여 사회현실을 개조할 수 있고 개조해야한다는 것이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그의 예술관은 그의 글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는 만리장성을 보며 감탄하지만 ‘그 많은 벽돌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는 사람들의 노역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희생된 약자들, 소수의 강한 권력에 무참히 당해야만 했던 다수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신영복은 ‘영남 지방의 유학적 사변보다는 호남의 민요에 담긴 생활 정서’를, ‘김유신의 攻成보다는 계백의 비장함’을, ‘시조나 별곡체의 고아함보다는 남도의 판소리와 육자배기의 민중적 체취’를, 그리고 ‘백제 땅의 끈질긴 저항의 역사’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18) 셋째, 마지막으로 실용적 예술관을 들 수 있다. 이는 고급한 예술 작품을 실생활에 쓰이게 한다는 의미의 실용적 예술관이 아니고 생활 속의 예술을 의미한다. 일상 삶의 예술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미’(美) 자는 ‘양’(羊) ‘대’(大)의 회의(會意)로서 양이 크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큼직한 양을 보고 느낀 감정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그 고기를 먹고 그 털을 입는 양은 당시의 물질적 생활의 기본이었으며 양이 커서 생활이 풍족해질 때의 그 푼푼한 마음이 곧 미였고 아름다움이었다. 이처럼 미는 생활의 표현이며 구체적 현실의 정서적 정돈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 바깥에서 미를 찾을 수 없다.19) 아름다움이 물질적 생활의 기본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 이것이 신영복의 실용적 미학관이자 예술관이다. 어느 목공의 鬼才가 나무로 새를 깎아 하늘에 날렸는데 사흘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그에게는 ‘우리의 생활에 보태는 도움에 있어서는 수레의 바퀴를 짜는 한 평범한 목수를 따르지 못한다’는 비판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 ‘글씨도 마찬가지여서 ‘一’ 자에서 강물소리가 들리고 ‘風’ 자에 바람이 인다 한들, 그것이 무엇을 위한 소용인가’20)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쓰임, 또는 삶의 보탬이라는 관점에서 그는 이른바 완상으로서의 예술, 美를 탐하는 예술 중심주의적 사고에 우호적이지 않다. 2. 한글 서예의 형성과정 신영복 한글 서예의 가장 큰 특징은 우선 옥중 서체라는 점이다. 신영복 한글 서예의 탄생은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영복의 학서 과정이 일반적인 서예 학습자들의 학서 과정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신영복은 어린 시절부터 조부로부터 붓글씨 가르침을 받았으나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공부는 감옥에 있는 동안 만당 성주표와 정향 조병호에게서 받은 사사이다. 일차적으로는 죄수 신분인 신영복이 교도소의 초빙으로 봉사활동을 하러온 성주표․조병호 두 분과 사제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 주는 시사점이다. 이 풍경은 사제 관계의 색다른 아우라가 있다. 거기에는 보통의 사사 관계가 만들어낼 수 없는 독특한 상황 논리와 긴장이 있다. 감옥이라는 특수한 조건이 주는 사회적 단절감과 고립, 복잡다단한 인간관계가 제거된 공간의 여백이 있다. 현대의 감옥이 왕조 시대의 유배와 형식을 달리하긴 하지만 그것은 형벌의 일종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사회적 활동의 제약이라는 점에서 내용적으로는 유사하다. 조선 시대 문학의 경우 ‘流配文學’21)이라는 용어가 따로 있을 만큼 유배지에서의 삶이 한 작가에게 주는 독특한 조건과 영향관계가 있다.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달에 한번 보내는 엽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22) 삶을 20년간 살았다. 그중 5년간은 감옥 중의 감옥이라는 독방의 세월이었다. 유홍준(1949~)이 신영복의 글씨를 논하면서 ‘조선 시대 서예의 대가 중에서 원교 이광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이 모두 귀양살이에서 그 위대한 서체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원교는 신지도에서 25년간,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 추사는 제주도에서 9년간 유배 살면서 그 사상과 글씨를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 “유배체”의 書家였음을 말한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추사, 다산, 원교 등 ‘많은 작가들이 정작 유배지에서 예술과 학문이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보면 필시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나 운명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다’는 이동국의 발언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아울러 신영복의 ‘온 종일 글씨를 썼던 기간도 7, 8년은 되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이동국은 ‘오히려 감옥이 아니었더라면 쇠귀체도 없었다는 확신이 간다’고 단언한다. ‘極工의 시간은 복잡다단한 일들이 무작위로 벌어지는 일상에서 갖기란 오히려 더 어려운 법이기 때문’23)이라는 것이다. 그와 스승이 일반 서예계의 도제적 사제관계가 아닌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재소자들에 대한 서예 지도의 권유를 받고 감옥에 왔던 조병호가, 조선 시대의 유배 신분과 비슷한 사상범들이 이 시대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24)에서 알 수 있듯이 신영복과 조병호는 특별한 사제 관계였다. 조병호 자신이 일제하에서 은둔의 길25)을 걸었던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조병호는 일제하의 선전에 작품을 냈다가 지인들의 지탄을 받고 이후 서예계와 인연을 끊은 것26)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의미 있는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 권력의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길항하는 한 인간이 현실 권력의 유혹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적 욕망의 끈을 놓고 재야의 서예가로 살아가던 사람이, 현실의 체제 자체를 바꾸겠다는 혁명 운동을 하던 사상범 신영복을 감옥에서 만났을 때 그 유다른 감회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4년여 기간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주 교도소를 방문하였으며 재소자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당신이 소장하고 계신 명필들의 진적을 일일이 짚어가며 일러주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봉사활동 차원 이상의 진한 유대감을 감지하게 하기 때문이다. 신영복이 기존 서예계에 아무런 위상도 갖지 않고, 서예계와 어떤 관련을 맺지 않고 있는 상황 또한 조병호의 개인적 삶의 노정과 관련해서 유의해 봐야 할 것이다. 신영복은 공모전을 통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지 않았다. 서예계 내의 인맥이나 학맥을 갖지 않은 채 감옥에서 고립된 학서 과정을 거친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도제식 師事에 의해 수련과 공모 과정을 거친후 작가로서의 위치가 결정되고 서예가로서의 활동이 시작되는 풍토에서 보자면 그의 경력은 이례적이다. 신영복이 감옥에서 만난 스승들에게 배운 것은 한문서예였다. 그는 한글 서예를 특정 스승에게 배우지 않았고, 조병호에게서 한문을 배우면서 한편으로 혼자서 한글을 썼다고 말하고 있다. 궁체는 이철경의 한글 궁체를, 고체 중에는 훈민정음 판본체를 썼으며 나중에 복사된 언간본을 보았다고 회고한다.27) 스승에게 직접 지도를 받는 것과는 달리 혼자서 공부하였다는 것은 그의 한글 서예에서 자유롭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있는 전제라 할 수 있다. 책의 글씨를 보고 혼자 쓰면서 배운다는 것은 자신이 쓴 글씨의 오류를 스스로 수정해 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여기에는 스승에게서 체본을 받아 연습하고 제자의 글씨에 대해 스승이 직접 가필을 하거나 오류를 수정하는 등의 훈육 체험이 없다. 물론 한문 서예의 사사를 통하여 그러한 과정을 이행해가는 중이었지만 한글을 쓰는 스승이 체본을 해주는 과정에서 몸의 자세, 운필, 붓을 흐름을 눈으로 익히는 것과는 다른 조건이다. 따라서 스스로 오류를 수정해야하는 약점과 함께 자신이 학서 과정의 주체가 되는 이점이 있었다. 예술 행위의 궁극적 목표 가운데 하나가 자유로움이겠으나 출발 단계에서의 자유로움은 자칫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자유로움은 긍정적 창조의 길로 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지만 방향 없는 오만이나 방일로 흐를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글 서예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궁체에 대하여 어느 정도 깊이 있는 공부를 하였는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는 이 반론의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이미 정리하고 있었다. ‘서예의 정신은 한글이나 한문이 다를 바 없다’며 그는 ‘서도의 정통은 어디까지나 서법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예의 ‘집필, 묵법, 용필, 필세 등 그 법이 넓고 깊은 것’이지만 서예의 정통을 잇는다고 하는 것은 ‘한자이든 한글이든 결국 필법으로 요약’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서예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할 때의 계승의 대상을 ‘中鋒, 管直, 藏鋒, 懸腕, 懸臂 등 用筆의 요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정통의 핵심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미학의 계승이라고 보았다. 정통성의 또 하나의 문제는 법첩의 임서와 같이 과거의 명필들이 도달한 미학의 계승문제이다. 명필들의 글씨에서 그 필법·사상·인격 그리고 미학을 읽을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사상과 미학을 통하여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 그리고 시대미학을 읽을 수 있다.28) 법첩 임서의 기본 수련을 전제로 미학의 계승이 정통을 잇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서예란 그것을 글씨로써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격과 사상, 그리고 당대 사회의 미학을 오늘의 과제와 정서로 지양해내는 작업이어야 하며 더구나 이 모든 것을 우리시대의 것으로 형상화하는 동시에 나의 것으로 이룩해내야 하는 것이라는 게 신영복의 결론이다. 정통의 핵심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미학의 계승’이고 그가 우리 시대의 민중 미학과 저항 미학을 담을 수 있는 형식을 찾게 되는데 신영복은 이를 母筆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의 어머니는 붓글씨를 쓰신 것으로 확인된다.29) 수인의 삶을 사는 옥중의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어머니의 간절함과 그 편지를 읽는 아들의 서정이 만나는 지점, 이것이 신영복 민체의 탄생을 가능케 한 중요한 지점이다. 신영복은 궁체가 이룩한 형식 미학의 특성을 분석하고 궁체의 미학에 어울리는 내용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궁체로 시조나 별곡, 성경 구절을 쓰면 어색하지 않은데 그렇지 않은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궁체의 형식에 담았을 때 어색하게 느낀 것은 ‘민요-저항시-민중시’ 등이었다. 그에게 궁체는 ‘유리 그릇’이었고 ‘민요-저항시-민중시’는 ‘된장’이었다. 된장이라는 ‘내용’과 유리 그릇이라는 ‘형식’이 자아내는 부조화를 확인하는 이 순간이 바로 신영복이 새로운 한글 서체를 탐색하는 출발 지점이다. 된장인 ‘민요-저항시-민중시’를 궁체라는 유리 그릇이 아니라 아닌 뚝배기30)에 담아야한다는 발상의 전환점이 이루어진 것이다. 신영복은 왜 궁체가 유리그릇이라고 느꼈던 것일까. 궁체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상궁들에 의해 형성된 글씨31)이다. 왕후들의 수렴청정 시에 나라의 정사에 관한 공문서를 궁녀들이 기록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으며 조선 사회의 국가 권력 수뇌부가 머무는 궁중의 수직적 질서 속에서 위로의 공경과 겸손, 아래로의 위엄과 정숙함을 간직한 사람들이 형성해 낸 글씨이다. 궁체 형성의 시대 상황과 신분적 조건에서 보듯 궁체는 귀족적 특성과 실용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어울려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공간의 한계, 신분적 제약 속에서 특수 계층에 의해서 형성된 서체이다. ‘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정한 한계성을 띠고 있는데, 사용주체나 목적에 부합되는 定形性이 과도하게 추구되어 자유스러움이 결핍’32)되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그러한 제약에 이미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영복은 궁체가 이 시대의 시대 미학을 담아 내는 서체가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나아가 지금, 여기서, 나 자신이 글씨를 쓰는 서사자로서 자신의 당대성을 실현하는 서체를 모색했다. 귀족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서민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서정과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어떻게 서예의 형식 미학 속에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요즈음의 한글 서도(書道)는 대체로 궁중에서 쓰던 소위 궁체를 본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저는 궁정인(宮庭人)들의 고아(高級)한 아취(雅趣)보다는, 천자문(千字文)의 절반인 “지게호(戶)” “봉할 봉(封)”까지만 외우시는 어머니께서 목청 가다듬고 두루마리 祭文을 읽으실 때, 옆에 둘러 앉아서 공감(共感)하시던 숙모님들, 먼 친척 아주머니들처럼 순박한 농부와 누항(陋巷)의 체취(體臭)가 배인. 그런 글씨를 써보고 싶습니다. 누구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고 나도 쓰면 쓰겠다는 자신감을 주는 수수한 글씨를 쓰고 싶습니다.33) 어머니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누항의 체취가 담긴 글씨를 쓰고 싶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신영복은 어머니의 글씨와 ‘어릴 적에 춘향전 필사본 등 어머님이 갖고 계셨던 두루마리 글씨를 생각하면서…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아내는’34) 서체를 시도하게 된다. 어머니가 춘향전 등의 필사본 책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을 신영복이 기억해내고 자신의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가는 참고자료로 삼았다는 점은 신영복 한글 서예 탄생의 종적 흐름에서 볼 때 빼 놓을 수 없는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영복의 기억에 찍힌 필사본의 인상은 결국은 조선 후기 서민들의 삶과 문화의 그림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영복 한글 서예 형성에 개입하게 되는 사실들, 말하자면 조선 후기 서민들이 남긴 필사본 글씨와 어머니의 모필 서한이 신영복에 이르는 사적 경험의 영역과, 공적 공간에서 설정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흐름으로 추사 김정희의 맥이 오세창․민형식 등을 거쳐 성주표․조병호에 이르고 그것이 교도소에 있는 신영복에게 이어지는 縱線이 겹쳐진다고 하겠다. 그것은 한글을 갈망하던 서민들의 하층 문화와 한문 중심의 사대부 문화가 병존해오는 양상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 두개의 지류가 통시적 흐름이고 60년대로부터 80년대에 이르는 격동의 현대사가 그 두 지류를 만나게 하는 공시적 배경이 된다 하겠다. 신영복 한글 서예의 형성에 개인과 가족, 가족과 사회, 그리고 서민들의 생활 문화에 남아있는 그 시대의 흔적들은 물론이고 상층 문화의 축을 이루던 한문 서예의 문화가 복잡하게 錯綜하고 있다. III. 작품의 내용과 기법 1. 작품의 내용 신영복은 서예 작품 속에 이 시대와 사회를 향하여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고자한다. 메시지는 주장이나 설득 또는 사회적 발언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회단체들의 후원행사가 있을 때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며 글씨도 글씨지만 문구가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기억이 난다’35)고 하는 경우, 이는 작품의 내용에서 메시지를 중시하는 신영복 서예의 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모든 예술 행위가 작가와 사회의 소통 수단이라는 것은 보편적 사실이지만 작품의 글 내용에서 신영복은 특히 메시지가 1차적 목적이고 서예는 그 메시지를 담는 수단이자 형식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서예가 다른 사람에게 또는 사회적으로 자기의 어떤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매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관계를 존중하는 새로운 문화를 서예의 미학적 구조를 통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영복은 다른 서예가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으로서 메시지를 다루었다. 신영복은 ‘민요-저항시-민중시’를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형식의 한글 서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구체화하였다. 저항과 민중의 개념들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현대사의 사회적 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다. 신영복이 첫 전시에서, 또는 그 이후에 작품화한 글의 내용과 그 글의 작자들에 대해 살펴보자. 신영복이 첫 전시에서 보여준 한글 서예의 내용을 쓴 원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박노해 -「손무덤」,「눈물의 김밥」<圖3> 신경림 -「새재」 신동엽 -「금강」 리영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圖4> 김지하 -「황토길」 박노해의 시 「손무덤」은 프레스 작업 중 손이 잘려나간 노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80년대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이고 열악한 노동 조건을 배경으로 노동자의 삶과 소박한 꿈이 얼마나 비참하게 짓밟히는지를 그리고 있다. 「눈물의 김밥」은 국가안전기획부 지하 밀실의 고문 현장을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박노해의 체포와 투옥의 체험이 반영된 이 작품은 군사 정부 아래에서의 끔찍한 인권 말살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경림은 ‘민중 현실을 리얼리즘적 객관성과 풍부한 서정으로 형상화’36)한 시인으로 평가 받으며 ‘한국 현대 시사에서 서정시의 창작을 방법적으로 혁신하고, 서사시의 창착 실천을 통해 방법적으로 확장시켰으며, 정치경제적 현���의 문제를 시에 반영하는데 다양한 방법적 확대를 시도’한 시인이다.37) 신영복이 첫 전시에서 쓴 가장 긴 글이 신경림의 「새재」였다. 10폭짜리 병풍 대작이다. 그는 2만자가 넘는 이 장편시를 오류와 수정 없이 한 번에 완성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신동엽은 ‘현대 사회의 삶과 문명에 대한 비판과 민족의 모순된 역사에 대한 비판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인간의 원초적 생명과 자연 그리고 민족의 순수성에 대한 동경’38)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 받는다. 특히 신영복이 작품화한 장편 서사시 '금강'은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민족사의 유장한 힘을 보여주는 최고의 민족 서사시39)라 할 만하다. 또 첫 도록의 작품 가운데 거친 붓맛으로 작품화한 ‘흙내’의 ‘모든 쇠붙이는 가라 향기로운 흙 가슴만 남고’라는 글은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의 한 구절이다.40) 리영희는 70~80년대 대표적 언론인으로서 ‘냉전 이데올로기와 그것을 존재 기반으로 한 독재 권력의 해체’41)를 위해 실천적 삶을 산 지식인이다. ‘1960-80년대에 광신적인 극우,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와 군사 독재 지배가 천지를 진동하며 한국의 하늘을 암울하게 뒤덮을 때 한국의 민주화와 대학생들의 의식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42) 리영희는 독재 권력에 탄압을 받으며 해직과 투옥을 거듭하는 삶을 살았다. 신영복이 작품화한 리영희의 글「새는 좌우로 난다」는 한국 사회의 사상적 우편향 현상을 비판하며 균형적 사고를 촉구한 글이다. 김지하는 ‘권위주의적인 비민주적인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에 맞선 민주화 투쟁과 그에 따른 인신 구속 등을 겪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 또는 수난의 시인’43)이자 ‘서구식 모형의 개발 이데올로기와 그에 따른 파행적인 질곡의 역사에 정면으로 응전하며, 그 극복의 길을 추구해 온 대표적인 시인이다.’44) 신영복이 작품화한 「황토길」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모순과 질곡 속에서 수난당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신영복이 쓰고자 했던 저항시, 민중시의 작가와 작품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들은 우선 작품의 내용이 지닌 이념적 진보성과 민중성이다. 신영복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그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밑바닥의 소외된 사람들, 피지배 계층, 일반 서민, 그리고 불의한 시대의 압박과 모순에 맞서 저항했던 민중들의 정서였던 것이다. 마침내 신영복은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에 대한 근원적인 공감과 연민에까지 다다랐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낮출 대로 낮추어 더 낮아질 데가 없어서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의 견고한 토대를 만들어낸 것이니 ‘밑바닥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45) 신영복은 자신의 관념성을 척결하고 뜨거운 현실성과 구체성을 획득하려 했고 그 예술적 표현이 바로 신영복 한글 서예의 탄생이었다. 그가 내용 문제를 심각히 고민하게 된 이유 가운데 글씨가 ‘누구의 벽에 무슨 까닭으로 걸리느냐에 따라 그 뜻이 사뭇 달리지고 마는 - 강한 物神性을 생각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 것인가에 대하여 결코 無心할 수가 없었다’46)는 점도 중요하다. 신영복은 서예 작품 속에 저항성과 민중성을 가진 글들을 담아 자신의 사상과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변혁 운동의 ‘과정’과 ‘주체’를 나타내는 이 말 즉, ‘저항’과 ‘민중’의 개념과 함께 제시된 중요한 방법론이 ‘연대’이다. 이것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방법이자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다. 그의 한글 민체가 때로 ‘연대체’로 불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신영복 서예론의 중요한 목록이다. 연대의 사전적 개념은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하거나 함께 책임을 지는 것’이다. 신영복은 이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지만 그 목표와 방향이 좀더 구체적이다. 신영복이 연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대체로 ‘下方’이라는 말을 함께 거론한다. 신영복이 쓰는 하방이라는 용어는 ‘下方運動’47)의 줄임말이다. 신영복이 말하는 연대는 그의 사상의 핵심인 관계론의 실천적 개념이자 사회변혁 운동의 방법론이다. 우리 학교의 사회교육원 노동대학과정에 있는 노조 간부들에게 연대(連帶)만이 희망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관계론의 실천적 개념이 바로 연대라고 생각합니다…연대는 반드시 하방(下方)연대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대의 가장 상징적인 가시물(可視物)이 물입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물이 가장 큰 바다가 될 수 있는 원리가 바로 하방연대에 있는 것이지요…예를 들어 노동조합의 경우 연대는 여성, 비정규직, 해고자, 빈민, 농민들과의 연대여야 하는 것이지요. 하방연대가 연대의 기본입니다.48) 신영복 서예의 내용이 철저하게 그의 사상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으며 그것이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사회 변화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노동조합, 여성, 비정규직, 해고자, 빈민, 농민’ 등 우리 시대의 가장 낮은 계층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구와 어떻게 연대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연대의 가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전시 도록 표지를 장식한 ‘손잡고 더불어’<圖1>라는 작품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신영복 자신이 문인이자 학자이고 사상가로서 직접 글을 쓴다는 사실이다. 그는 뛰어난 문필가이다. 앞에서 살펴본 작가들의 글과 함께 다른 사람들의 글을 작품화하기도 하지만 실제 대부분의 작품이 신영복 자신이 직접 창작한 글들이다. 이는 서체와 작품의 내용을 주로 옛것에 의존하려는 현대 서단의 상황에 비추어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다. 自作으로 내용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없는 서단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동국의 발언49)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신영복은 한시를 창작하기도50) 하지만 대개는 일상적인 어휘를 새롭게 해석하여 간결하게 제시함으로써 색다른 맛을 내는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다. 그의 서예가 대중들에게 깊은 정서적 반향을 일으킨 핵심은 독특한 서체와 함께 평이한 문장 속에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담는 데 있다. 때로 그의 글은 빼어난 사상적 압축과도 같은 경구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처음처럼’<圖2>의 경우도 그렇다. 새로운 말이 아니지만 평범한 어휘를 독특한 서예 미학에 담아내면서 간결한 附記와 함께 ‘처음처럼’의 의미를 되새기게 함으로써 대중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진 것들이 첫 전시의 도���에 실린 ‘한솥밥’<圖5>, ‘바깥’<圖6>, ‘너른 마당’<圖7>, ‘샘터찬물’<圖8> 등의 작품이다. ‘바깥’의 부기인 ‘너와 내가 만나는 곳’이라는 말은 지식인의 폐쇄적이고 개별적인 속성에 대한 비판처럼 들리기도 한다. 바깥의 열린 공간, 현장의 공간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닫힌 공간에서 개별적인 나와 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공간 바깥에서 너와 내가 만나 관계를 형성해야한다는 당위의 선언인 것이다. ‘열린 대문 너른 마당 두레상 한솥밥’이라는 부기를 단 작품 ‘너른 마당’ 또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그의 생각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러한 구절들은 평이한 문장으로 신영복 자신이 갖고 있는 사상과 철학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 자신의 관계론적 사유의 결과물들을 대 사회적 메시지로 전환해내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신영복이 서예를 통하여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평이한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광범위한 대중적 공감을 획득한다는 점이다. 예술이 지나친 의도성과 이념성을 담을 때 경직된 구호나 포스터가 되는 약점이 있는데 신영복은 이 한계를 극복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를 추구하다가 아예 현실을 표백해 버린 앙상한 자기만족에 빠지는 순수 예술의 오류에 빠지지도 않으며 이념성을 추구하다가 경직으로 흘러 대중들과 멀어지는 함정에 빠지지도 않는다. 신영복이 ‘작가와 독자가 멀면 예술이 아니’51)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의 글은 그가 살아온 시대와의 깊은 상호 작용의 결과물로서 시대를 성찰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문장은 산문이지만 빼어난 시적 표현으로 가득 차 있으며 비유와 상징, 시대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혜안을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다음 장에서 다루게 될 그의 서체 자체의 형식 미학이 사상과 일체가 된 표현이기에 이는 나뉠 수 없는 부분이라 하겠다. 詩로 볼 수도 있고, 때로는 잠언이나 경구가 되기는 하는 문장들이 긴장감과 견고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2. 서체의 표현 양식 그의 붓글씨에 드러난 다양한 특징을 운필과 章法, 結構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字體의 형태를 분석할 때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가는 방법과 전체에서 부분으로 나아가는 방법이 있는데 사실 신영복 한글 민체의 경우 어느 것도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신영복의 글씨는 항상 전체로서 파악되어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서론에 기인하고 있다. 畫의 成 ․ 敗란 畫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關係」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畫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獨存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字」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字」 또는 그 다음다음 「字」로서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그 중 한 字 한 畫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얼개가 전부 무너질 뻔한, 심지어 落款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均衡에 한몫 참여하고 있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濃密한 「相��連繫」와 「統一」속에는 이윽고 墨과 餘白, 黑과 白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對立과 調和」 그것의 統一이 창출해내는 드높은 「질」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규격화된 字, 字, 字의 단순한 量的集合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群棲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습니까…畫과 畫間에, 字와 字間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墨을 갈 적마다 人과 人, 間의 그 뜨거운 「連繫」위에 서고자 합니다.52) 자신의 글씨가 가진 특징에 대해 스스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규격화된 字, 字, 字의 단순한 量的集合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群棲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느냐’는 질문 속에는 궁체가 가진 특징과 한계를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말하자면 신영복은 궁체가 가진 규격화의 특성, ‘字, 字, 字의 단순한 量的集合’이 주는 개별성을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규격화에서 탈규격화로, 量的集合에서 질적 결합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신영복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앞에서 얘기한 관계론적 패러다임의 서예적 표현이다. 통일된 전체 속에서 부분의 가치가 드러나고 있음을 강조하는 신영복 서예의 특징상 부분을 전체에서 떼어 분석하는 것은 자칫 그의 글씨를 파편화할 위험이 있다. 다만 신영복 민체의 특성상 전체의 일부로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지를 좀 더 유의하면서 분석에 임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동안 한글 서예사의 흐름에서 신영복이 보여준 새로운 시도들을, 부분 분석을 거쳐 전체 분석을 가하는 방식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표 1> 자음 모음 등 起筆의 다양한 획과 형태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5 16 17 먼저 그의 운필의 특징을 보자. 起筆, 行筆, 收筆 등에서 신영복은 어떤 획을 구사하였는가. <표 1>은 자음과 모음의 획의 起筆 부분을 모아본 것이다. 기필부분의 특징을 보기 위하여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 다양한 형태의 획���을 뽑아보았다. 붓의 특성상 붓을 지면에 대는 순간의 형태는 아주 다양해진다. 그러나 궁체의 경우 기본 원칙이 있고 형태의 변화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신영복의 경우 붓을 지면에 대는 순간의 다양한 변화를 의도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1처럼 逆入을 깊숙이 하여 원봉을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와 대비되는 형태로 9, 10처럼 노봉을 쓰는 경우(물론 이것은 문장의 첫 글자의 첫 획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며 다른 획에 이어질 때의 모습이다)도 있고, 붓을 지면에 대는 순간 힘을 모았다가 바로 빼면서 거북의 머리 모양(3, 4)이 나오기도 한다. 7, 8처럼 역입을 가볍게 하고 노봉의 분위기를 내거나 11처럼 편봉을 쓰면서 기필하기도 한다. 다른 획에 이어진 획의 경우 2처럼 방필 형태가 나오거나 5, 6처럼 움직임과 변화가 많은 획이 나타나기도 한다. 획의 굵기는 전체 글씨를 보면서 설명할 때 온전히 그 특징이 드러나겠지만 16, 17의 경우 획의 굵기를 아주 가늘게 하여 변화를 주려고 한 경우이다. 지면에 대는 순간의 다양한 변화를 비��하여 行筆의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힘의 변화와 굵기의 변화, 遲速의 변화를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힘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 기필의 순간에 藏鋒, 露鋒, 圓筆, 方筆의 다양한 변화를 꾀하는 것은 물론이고 음획이나 양획 모두 수평과 수직을 따라가지 않은 변화무쌍을 보이면서도 행 전체적으로 안정된 틀 속에 들어가 있다. 어느 한 起筆도 지루하게 동일한 필획을 보여주지 않고 있으면서 각각의 획은 전체의 작품이 구성하고자하는 미감에 기여하고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붓글씨가 신영복에게 와서 갑자기 새로운 획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의 학서 과정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한문을 통하여 체계적인 운필을 익혔고 이를 한글에 적용하였다고 했다. 그가 사용하는 획들은 기필이나 收筆, 가로 획․ 세로 획․ 斜線의 진행․ 轉折 등에서 기존의 필법들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 학교 교수분들도 지금 서예를 배우고 있는데,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하지만, 한글은 나중에 쓰도록. 우선 한자의 필획을 다 ���혀야 되요. 물론 한글도 궁체, 판본체부터 먼저 할 거예요. 그 다음에 시도를 해야 되지 않는가.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전통에서 물려받을 것을 다 물려받은 다음에, 그 다음에 창조적인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53) 이것은 신영복이 성공회대 교수로 있으면서 그의 글씨를 배우고자한 다른 교수들을 가르칠 때 그가 가진 원칙이었다. 신영복은 과거의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으며 과거로 들어갔고 그것을 딛고 창조적인 시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운필이 과거의 글씨들과 차별성을 갖는 특징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글씨에서 볼 수 없는 분명한 특징을 간직한 획들이 나타나고 있다. <표 2> 초성 ‘ㅇ’의 특징을 볼 수 있는 글자들 음 어 우 여 신영복 한글 민체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형태와 필선의 특징을 살펴보자. 필자는 그가 한글 민체의 자음 형태와 획에서 보여준 새로운 시도로 초성의 ‘ㅇ’과 종성의 ‘ㄹ’에 주목하고자 한다. 먼저 초성 ‘ㅇ’획이다. <표 2>��� 있는 초성의 ‘ㅇ’은 기존의 한글 서예 운필과 형태에서 찾기 어려웠던 것들이다. 궁체의 필법에서 ‘ㅇ’은 한 번에 긋거나 좌우 두 번의 운필로 완성한다. 한번에 ‘ㅇ’을 완성하고자할 때 서자는 붓을 정돈하기 위하여 세 번 정도 머무르는 동작을 하게 되고 이것은 획의 안쪽과 바깥쪽이 모두 안정적인 원형을 만드는 필법이다. 그리고 궁체의 경우 흘림에서 변화가 있긴 하지만 ‘ㅇ’은 주로 선의 굵기를 일정하게 하는 게 기본 원칙이다. 판본체 필사나 목판의 경우 세모꼴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 역시 세 번의 획을 고르게 하여 완성하는 게 일반적이다. 신영복은 ‘ㅇ'의 파격을 시도했다. 일단 원의 모양을 일그러뜨렸고, 세 번 이상 네 번이나 다섯 번까지 꺾는 轉折과 유사한 필법을 구사하였다. 전절은 한자에서 직각을 만들거나 예각 둔각을 만드는 등 직선이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때 쓰는 기법이다. 그런데 신영복은 원형을 만드는 획에 이것을 원용하였다. 궁체에서 붓의 방향을 구심력을 향하여 그어왔던 왔던 것과 정반��로 원심력의 방향으로 붓을 놀려 원의 모양을 만든 行筆인데 전혀 새로운 맛을 주고 있다. ‘ㅇ’의 특성이 부드러움인데 이 부드러움의 핵심은 <표 3>종성 ‘ㅇ’ 선의 안팎을 모두 흐트러짐 없이 긋는 것이다. 그런데 신영복의 경우 원의 바깥 선을 거칠게 하거나 갈필로 날카로운 가시를 돋게 하고 안쪽은 대체로 매끄러운 선으로 배치하여 대비의 운필을 하고 있다. ‘음’의 ‘ㅇ’의 경우처럼 안팎으로 거친 맛을 내기도 하지만 대체로 안쪽에 부드러움이, 바깥쪽에 거침이 배치되면서 상반된 붓맛이 공존하는 미감이라 할 수 있다. 이 획의 또 다른 특징은 ‘ㅇ’의 형태가 앞서 말한 것처럼 심하게 일그러져 좌상에서 우하로 길어진다는 점 그리고 약간씩의 변화가 있긴 하지만 좌상 부분에 무게 중심이 실리면서 불안한 형태를 취하곤 한다. ‘ㅇ’이 굵기의 변화를 주기 어려운 획인데 신영복은 기존의 ‘ㅇ’을 그을 때 기존의 서법에서 4번 정도 머물러 붓을 정돈하던 위치에서 과감하게 격한 변화를 주며 힘을 빼거나 더하고 있다. ‘음’의 ‘ㅇ’처럼 渴筆이 나타나거나 굵기가 계속 변하고 있다. ‘ㅇ’ 하나의 자획에 遲速과 潤澀을 섞는 운필을 보여고 있는 것이다. 신영복은 종성 ‘ㅇ’의 경우에도 원형을 쓰지 않고 <표 3>에서처럼 대체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판본체에서 이미 시도된 것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종성 ‘ㄹ’을 보자. <표 4> ‘ㄹ’과 횡획의 특징을 보여주는 예 ‘ㄹ’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표 4>의 원 표시가 되어 있는 곳이다. 이 획은 정자로 쓸 때 가로 세로 획을 따로 분리해보면 총 5획이고 궁체의 반흘림은 마지막 획이 대체로 둥글게 마무리된다. 위 작품에서 ‘ㄹ’은 4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자의 ‘ㄹ’을 보자. 첫 획과 두 번째 획으로 'ㄱ'을 만들고 세 번째 획으로 좌상에서 우하로 둥근 획을 그은 후 마지막 획이 길게 벋어 있다. 마지막 획이 3번째 획의 왼쪽으로 튀어나오게 쓴 것(○ 부분)이 새롭다. 획의 마무리가 파책처럼 꼬리를 남기는 것(△ 부분)도 ‘ㄹ’의 새로운 운필이다. 한자��� 한글 모두 그동안 ‘세로쓰기’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이 세로쓰기의 경우, 붓의 흐름상 횡획이 삐침으로 처리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한자의 행서나 초서라 하더라도 세로쓰기의 특성상 횡획의 마무리는 붓이 머물면서 털끝을 모으는 지점이기 때문에 횡획의 끝을 삐침으로 처리한 것은 신영복이 가로쓰기를 하면서 시도한 새로운 운필이다. 가로획이 삐침으로 끝나는 경우는 예서의 파책에서 유일하게 존재했었고 한글에서는 흘림이라하더라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永字八法의 획 중에서 磔이 45도로 내리 뻗는 것을 볼 수 있는 정도다. 이러한 현상의 중요한 원인은 신영복의 가로쓰기와 관련이 깊다. 한 글자의 끝 획이 세로획으로 끝날 경우 마무리에서 붓의 힘을 빼는 것은 가로쓰기의 다음 글자로 이어지는 선이기 때문에 당연히 필요한 변화이다. 따라서 기존의 세로쓰기에서 둥근 획으로 마무리 되는 ‘ㄴ’, ‘ㄷ’, ‘ㅌ’, ‘ㄹ’의 끝 획이 신영복의 가로쓰기에서는 대체로 무겁지 않게 처리되곤 한다. <표 5> 종성 ‘ㄹ��의 여러 형태 1 2 3 4 5 6 7 8 9 또한 ‘길’에서의 ‘ㄹ’은 화살표 부분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 번째 획과 마지막 획 사이에 여백(↙부분)을 둔 것이다. ‘더불어 한길’이라는 작품 전체에서 보자면 두개의 'ㄹ'을 서로 다르게 쓰면서 변화를 준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 화살표 부분의 공백은 ‘ㄹ’ 획의 3번째 획이 마지막 획과 만나면서 생기는 무거움을 덜어내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변화를 주었지만 ‘ㄹ’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어렵게 하지도 않았다. <표 6> 필사본에 나타난 다양한 ‘ㄹ’의 형태. 진대방전에 ', 를'의 종성 ‘ㄹ’이 ‘≡’로 표기되어 있다. 신영복이 ‘ㄹ’ 획 하나에도 얼마나 많은 변화를 주려고 했는지 <표 5>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중에서 3,4는 작품의 부기를 쓸 때 주로 나타난 형태인데 1分筆로 가볍게 운필한 경우이다. 3의 경우 전체 글을 읽어가다 보면 그것이 ‘ㄹ’임을 아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 ‘ㄹ’ 자음의 획을 두개씩이나 빼버림으로써 ‘표기법 논란’이 일수도 있지만 이는 사실 <표 1>54)에서 보듯이 조선 후기 민체에 이미 나타났던 형태이기도 한다. 9 역시 한 획을 생략하였다. 이것은 ‘ㄹ’의 특성상 5획이나 되는 운필의 중첩에서 오는 무거움을 덜어내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는 마치 조선 후기 민체에서 ‘ㄹ’이 <표 6>처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던 것과 비교할만한 예라 하겠다. <표 1> 가로 획의 예 1 2 3 4 5 다음으로 모음의 특징을 살펴보자. 모음은 기본적으로 가로 획과 세로획인데 신영복이 모음에서 가장 큰 변화를 준 것은 세로 획이다. 가로획이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로 획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게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초성 중성 종성이 있는 글자의 경우 중성 가로획은 그 글자의 허리에 해당된다. 신영복은 이 허리 부분에 대해 오히려 변화를 심하게 주지 않음으로서 전체 글씨가 산만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영복의 글씨가 대체로 動的인 느낌을 주고 있는데 허리 부분에 ‘靜’이 위치하여 상대적으로 動中靜의 미감을 연출하고 있다. 이 가로 획에도 변화가 있으나 크지 않다. 종성이 없이 ‘ㅡ’, ‘ㅗ’, ‘ㅛ’로 끝나는 경우 가로획이 밑바탕이나 신체에 비유하면 발바닥에 해당되는데 이런 경우도 세로획만큼의 변화를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역시 굵기와 각도의 변화를 주고 있다. <표 7>을 보면 1, 2처럼 가로획의 배가 위로 올라오게 하거나, 5처럼 아래로 향하게 하는 변화가 있다. 4의 경우처럼 두 번 방향을 바꾸는 변화도 있다. 공통점은 모두 수평이 아니라는 것이고 우측이 올라가 있다는 것이다. 획의 굵기에도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다. 이 정도만 가지고도 역동성은 숨쉬고 있다. 신영복 한글 민체의 변화성과 역동성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핵심으로서 세로획의 운필과 형태를 살펴보자. 세로획에 신영복이 의도하는 역동성과 변화성을 풍부하게 하는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 <표 8>에서 보듯이 우선 수직으로 얌전히 내려가는 경우가 없다. 한번을 꺾든 두 번을 꺾든 방향의 변화를 주고 있다. 곡선�� 형태로 두 번 방향을 바꾼 1, 2나 세 번 방향을 바꾼 3,4,5경우가 있고 한번으로 곡선의 형태를 취한 7과는 다르게 8의 첫 번째 세로획의 경우는 물결 흐르듯이 곡선의 형태가 계속되고 있다.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어진 것(1, 3, 7),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것(2, 6), 곧추선 것(5, 8) 등으로 나타난다. 끝 부분의 방향도 주목할 만하다. 세로쓰기의 경우 1,2,3,4처럼 획이 <표 8> 세로 획의 예 1 2 3 4 5 6 7 8 오른쪽으로 뻗어 가면 다음 획과의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 대개의 경우 흘림은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야한다. 그러나 신영복은 가로쓰기를 하면서 이 제약을 풀어헤쳐 방향이 자유로워지고 있는 것이다. 세로획의 다양한 변화는 세로획 홀로의 모습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의 획과 자형, 그리고 뒤에 올 획과 자형까지 염두에 둔 운필이며 전후좌우의 균형을 잡거나 조화를 위해 일어난 변화이다. 세로획을 그을 때 그동안 시도된 새로움은 획의 굵기에 변화를 주거나, 머리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도록 하는 경우가 있었다. 세로획의 변화는 예를 들면 ‘ㅣ’의 획 한 부분을 꺾어 行筆하는 예가 있었다. 붓의 방향을 한번 바꾸는 것이다. 주로 아래로 향하다가 왼쪽으로 꺾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세로쓰기의 특성 때문이다. 신영복의 경우 지나친 각도를 주는 것은 아니고 붓의 흐름에 의지하는 듯 하면서 최대한 의도성을 감추고 있다. 붓을 흐름을 유연하게 따르지만 힘의 중심을 잃지 않고 있다. 의도 속에 의도를 감추고 있는 운필이다. 붓의 방향을 적어도 2번 이상 꺾는 시도를 하고 있으나 억지스럽지 않다. 궁체 이후의 다른 서예가들이 변화를 주려고 했던 경우는 궁체의 머리 부분이 왼쪽을 향해서 기울어진 데 반해 머리 부분을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는 특성이 있었다. 이런 경우 세로획은 무게 중심이 오른쪽으로 넘어지려는 분위기를 갖는다. 이러한 획 또한 변화와 역동성을 갖는다. 신영복의 경우 세로획과 반대로 아래가 오른쪽으로 나아감으로 해서 획의 머리가 왼쪽으로 넘어질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획은 상당한 불안감을 가진 형상인데 글씨 전���에서 역동성과 물이 흐르는 듯한 유려한 미감을 창출하는 주동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초성의 ‘ㅇ’과 종성의 ‘ㄹ’, 그리고 가로획과 세로획 ‘ㅣ‘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영복이 새롭게 시도한 초성 ‘ㅇ’의 경우 원형의 틀을 깨면서 심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궁체의 경우 최대한 완벽한 원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궁체 흘림의 경우 변화가 생기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원형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중심점을 두고 원형을 완성한다. 신영복의 파격은 ‘ㅇ’을 삼각형으로 바꾼 형태보다 더 심한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신영복 글씨의 자음 가운데 가장 강한 변화와 역동성을 드러내고 있다. ‘ㄹ’ 경우 ‘ㄹ’로 표현할 수 있는 변화를 최대한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태를 다양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획의 굵기나 선의 방향을 끊임없이 바꾸어 나감으로서 변화와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모음의 ‘ㅣ’에서 더욱 확연하게 볼 수 있다. 신영복�� 거의 모든 획이 직선인 경우가 거의 없는데 특히 ‘ㅣ’모음에서 가장 심한 곡선과 변화를 주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의 음운에서 벌어지고 있는 형태와 線質의 변화가 음운 자체만을 위한 변화가 아니라 주변 글자의 형태와 조화를 최대화하려는 형태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점이다. 장법과 결구를 분석하면 이것이 잘 드러난다. ‘더불어 숲’이라는 하나의 문구를 작품화한 <표 9>를 보자. 이 작품들은 한꺼번에 의도적으로 다르게 쓴 것이 아니라 시기적으로 다른 작품들이다.55)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것도 있고 행사할 때 쓰기 위하여 현수막에 인쇄한 것도 있다. 여러 작품을 <표 9> ‘더불어 숲’의 작품 예 1 4 2 5 3 6 한 자리에서 철저히 계산하여 쓴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각각의 획들이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물론 전체 구도와 분위기가 다르다. 첫 자음 ‘ㄷ’을 보자. 첫 가로획의 모습이 다양하다. 상향으로 그은 것(1, 2, 4), 수평으로 그은 것(5), 둥글게 ���은 것(3, 6) 모두 다르다. ‘ㄷ’의 끝 획이 무겁게 끝난 것(1, 3, 4)이 있는가 하면 꼬리를 내면서 띄어 쓴 것(5)이 있고, 붙여 쓴 것(2, 6)도 있다. ‘ㅓ’의 모습도 모두 다르다. 이와 같이 ‘ㅂ’, ‘ㅜ’, ‘ㄹ’, ‘ㅓ’, ‘ㅅ’,‘ㅍ’등 자음 모음이 작품마다 모두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단순하게 2획으로 구성된 ‘ㅅ’의 변화를 꾀하기 위하여 굵기와 운필을 다르게 하고 있다. 특히 앞에서 설명한 ‘ㄹ’의 형태가 다양하다. 그리고 ‘ㅍ’도 모두 다른 형태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4획으로 구성된 ‘ㅍ’의 경우 2획과 3획을 1, 4획과 띄우거나 붙이는 방법을 통해 변화를 주거나 전체 형태를 달리하여 모두 다른 분위기와 미감을 주고 있다. 가장 비슷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삼각형으로 처리된 ‘ㅇ’이다. ‘ㅇ’의 형태가 모두 삼각형으로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더불어 숲’이라는 문구의 지향성과 음운들의 특성 때문이다. 이 여섯 개의 작품들이 가진 공통점은 모두 글자들을 붙여 쓰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바로 ‘��불어 숲’이라는 문구가 지향하는 연대의 감수성이다. 민중 운동에서 그가 강조하는 연대의 의미는 앞서 논의한바 있다. 연대는 사람과 사람, 조직과 조직이 서로 손을 잡는 것이다. 관계를 맺는 것이고 관계를 단단히 하는 것이다.56) 따라서 글자와 글자를 연결하여 연대의 감수성을 표현하려는 신영복의 의도를 읽게 된다. 그런데 ‘불’의 ‘ㄹ’과 ‘어’의 ‘ㅇ’이 만나려면 ‘ㄹ’의 끝 획이 위로 올라가든가 ‘ㅇ’이 전체적으로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그렇게 하려다 보니 ‘ㅇ’이 앞에서 예를 들었던 것과 같은 다양한 형태(표 7)를 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원심력과 구심력을 뒤섞어 놓은 <표 7>의 ‘ㅇ’ 형태는 대체로 좌상에 무게 중심이 실리면서 좌하 부분이 비어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밀집된 형태를 취한 2의 경우만 ‘ㅇ’이 ‘ㅜ’의 가로획과 만나고 있다. 선의 굵기에도 변화의 특성은 확연하다. 한 글자 내에서도 모든 획의 굵기를 다르게 하든지 아니면 방향을 바꾸든지 하면서 계속 변화하고 있고, 한 작품 ��에서 모든 선의 굵기가 다르다. <표 9>의 작품의 장법을 보자. 1은 글자를 납작하게 하여 썼고 그와 대비되는 형태로 2는 글자들을 세로로 길게 하면서 굵기를 강화하였다. 2번이 씩씩한 분위기를 주는 반면 6번은 어딘가 수줍은 듯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러면 이러한 형태와 線質이 가진 미감은 무엇일까. 미감은 과학적 결과라기보다는 정서적 반응이기 때문에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지만 앞서 보았듯이 신영복의 민체가 주는 특징은 객관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다른 형태와 획․선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변화와 다양성이다. 또한 신영복이 추구했던 기본적 성격, 즉 ‘궁체로 표현되지 않는 정서’를 참고하여 보면 그의 글씨가 주고자했던 미감과 정서가 무엇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변화와 다양성이 주는 미감은 力動性이라 할 수 있다. 역동성은 변화성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역동성은 획의 기울기와 관련이 깊고 변화성은 획의 굵기와 관련이 깊다. 궁체가 수평과 수��의 선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것이 안정성을 주기 때문이다. 궁체가 지루함을 주지 않는 선에서 굵기의 변화를 주는 반면 신영복은 변화성 자체를 목적으로 한 듯이 굵기의 변화를 주고 있다. 그것은 안정보다는 불안정을, 정지보다는 전진을, 수동보다는 능동을, 감추기보다는 드러냄을, 질서보다는 무질서의 미감을 준다. 이것은 궁체가 글자 한자 한자의 자기 완결성을 갖는 데서 발생하는 안정성의 미감과 대비되는 방향의 미감이다. 또한 각자가 자기 완결성을 갖는 서체로서 궁체가 개별 글자의 양적 결합, 물리적 결합에 가깝다면 신영복의 한글 민체는 질적 결합이자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궁체가 개별 존재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전제에서 성립된 서체라면 신영복 한글 민체는 畫과 畫, 字와 字, 行과 行이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형성된 서체이며 전체로서의 균형과 조화를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관계론적 사고의 서예적 표현이다. 그의 한글 민체 가운데 연대의 ��수성을 특히 강조하고자 한 경우 글자와 글자를 서로 닿게 하는데 이런 경우 한 글자를 떼어내서 보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글자를 붙이지 않은 경우라도 한 글자를 따로 떼어내 놓고 보았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풍기는 미감은 확연히 다르다. 물론 궁체라고 해서 장법이 없는 것도 아니며 흘림체의 경우 문장의 흐름에 의해 결구가 결정되고 이것이 장법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궁체는 흘림이라 하더라도 한 글자 자체의 기본 틀이 있고 이 틀에서 형태상의 변화가 미세하게 발생할 뿐이다. 신영복은 궁체의 개별적 존재성을 관계론적 미학 속에 재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궁체의 창작 주체는 궁녀였고 사용자의 측면에서는 왕족들의 것이었다. 일반 서민의 접근 자체가 제한되어 있었다. 궁체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정통 서단과는 반대로 신영복의 글씨는 서단이 가진 질서와 권위 밖에서 시작되고 확산되었다. 신영복 민체의 형성은 궁체가 가진 엄정, 단아, 절제, 겸손, 인내의 궁중적․귀족적 정서의 미감과 권위��� 해체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풀어헤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는 그가 살아온 삶의 과정과 일치되는 정서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과 사회구성원들의 존재 양식을 규정하는 하부구조로서의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혁명운동가로서 그가 가진 세계관이 글씨에 배어 들어간 것이다. 글자와 글자가 서로 손을 잡고 있거나 어깨와 다리를 걸치거나 허리를 감고 있는 것이 이 작품들의 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관계을 중시하는 신영복의 사상과 직통하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던 혁명, 그 강력한 사회 변화의 열망이 변화무쌍한 선과 형태를 바탕으로 한 역동적인 서예로 드러난 것이며 그 목표를 위해 그가 제시한 방법론은 끝없이 자기를 낮추어 거대한 바다를 물처럼 절대 다수의 대중들이 강고한 연대를 통하여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80년대 미술 운동에 나타난 민중적 감수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하겠다. ‘민중적 감수성’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서예 용어에서 사용된 적이 없다. 한국 서예사에서 ��항적 민중의 정서를 표현한 서예는 등장한 적이 없다. 훈민정음체가 지배계층의 완고한 위엄과 무게를 표현한 예술 미학을 가지고 있다면 궁체는 단아한 궁중 여인들의 정서를 완벽하여 구현하여 한글의 대표 서체가 되었다. 이후에 몇몇 새로운 서체가 시도되어 각각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신영복이 구현해낸 한글 민체의 미학적 감수성은 민중성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서예사의 한 길을 열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작가들이 보여준 길들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고 신영복은 신영복 나름대로의 예술관과 작품을 보여주었다. 신영복 한글 민체는 민중적 서예 미학의 출발이자 새로운 길이다. 이는 민중적 요구가 거대하게 분출하던 시대적 분위기와 어울려 그 시대의 한 역사적 흐름을 짚어내고 이를 서예로 집약해낸 것이다. 신영복은 시대정신의 한 특징을 담아낸 작가로 평가해도 무난하리라는 판단이 든다. 섣불리 완성을 얘기해서는 안 되겠지만 적어도 서예사에 민중적 감수성과 미학의 출발을 알리는 강력한 신호탄이라는 점은 부인될 수 없을 것이다. IV. 한글 서예의 시대정신과 평가 1. 대중성 필자가 신영복의 한글 서예를 연구의 대상으로 다루기로 한 중요한 이유는 그의 글씨가 지금 우리 시대의 가치 가운데 하나를 잘 포착해내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술적 성취도 의미 있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대중적 감염력을 가지고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판단에 다른 것이다. 이 세 가지 평가는 필자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객관적 근거가 전무한 것이라면 연구 대상으로서 문제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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