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론] 관계, 非근대를 조직하다(신영복의 관계론과 인간적 삶의 조직 )

관계, 非근대를 조직하다 - 신영복의 관계론과 인간적 삶의 조직 - 성공회대학교 시민사회단체학과 강수진 석사학위논문(2013) Ⅰ. 서론 1. 들어가며 문제의식 : 오늘날의 근대적 삶은 비인간적이다. 인간적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모든 사회관계의 끊임없는 교란, 항구적인 불안과 동요가 부르주아 시대를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별해 준다. 고정된 것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모든 신성한 것들은 모욕당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마침내 자기의 생활 상태와 상호관계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1) 오늘 어느 신문 칼럼의 한 문장이라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끊임없는 혁신, 항구적인 불안과 동요, 새로 생겨나는 모든 것조차 미처 자리 잡기 전에 이미 낡은 것이 되고 마는’ 가속화, 고정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급속한 해체 등은 근대성의 역사적 경험(이기홍, 2010: 49)인 동시에 오늘의 모습이기도 하다. 오히려 마르크스(Karl Marx)의 목소리는 더욱 선명히 파장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이런 근대성의 특징들은 불안정성, 불평등성, 지속불가능성의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진화되어 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실업에 대한 보편적 두려움, 전문인 양성을 지향하는 교육, 소비로의 대리만족, 경쟁으로서의 가치매김, 속도와 효율우선주의 등으로 근대적 원리는 일상의 공간과 시간의 내부로 깊숙이 들여져 있다. 또한 이것은 IMF, FTA, 금융위기, 20대80을 넘어서 이제 1대99의 극빈부차의 모습으로 그 특성을 돌출시키고 있다. 인간을 기능적인 노동력으로 유도하고 소모하는 ‘자본주의의 인간상’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일상에서 인간적 자존감과 여유로움은 오히려 낯선 단어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자본주의는 개인과 가족, 사회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수성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뿐 아니라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기초적 생존의 조건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하고 삼중 사중으로 소외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인간적인 삶인가? 왜 우리는 다수가 행복하지 못하고 자연스럽지 못한 삶을 지속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위기 속에서 위험을 인지한 경험들은 삶의 근거나 동기를 다시 찾기 위해 본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상태와 서로간의 관계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때임을 자각하게 한다. 글의 시각 : 신영복의 관계론은 인간적 삶을 위한 인식론적,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신영복은 우리가 서 있는 “현재의 시점은 근대사회 이후에 세계의 다양한 사고와 정서를 단색적으로 도장해온 ‘존재론’에 관한 근본적인 반성의 시점이고, 동시에 이러한 반성을 기초로 한 관계론에 대한 각성의 시점”(신영복, 1998c)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이에 대한 비판적인 반성이 필요하고 이에 대응하는 보다 나은, 인간적인 삶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우리가 고민하여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동양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모습에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는 관계론적 가치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적인 삶의 모습들을 드러낼 시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글의 시각은 자본주의를 근대성으로 보고 이로 인해 피폐해진 오늘날의 우리의 삶은 이것의 비판적 성찰과 반성의 지반위에서 ‘인간적 삶’으로 방향성을 잡아야 한다는 신영복의 관점에 대한 공감을 전제한다. 또한 이를 내포하고 있는 신영복의 담론인 관계론이 인간적 삶을 위한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신영복의 담론인 관계론을 어느 하나의 정의로 마름하기에는 어렵다. 관계론은 신영복이 감옥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담론의 이름이다. 그의 관계론은 상태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삶, 세계관, 혹은 인식론이나 실천론으로 불려 질수도 있다. 목수의 그림을 통해 관념적 지식의 정체와 마주하기도 하고, 콜럼버스의 달걀을 통해 오늘날의 동서양의 문명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그 전화의 방향성에 대하여 통찰적으로 접근하고 있기도 하다. 이글은 관계론을 사회사상의 측면에서 바라보면서 우리가 지어갈 사회, 인간적 삶을 위한 방법론으로 읽어내려는 입장이다. 글의 범위 : 사회사상으로 본 신영복의 관계론에서 非근대2)의 요건들을 조직한다. 그러하기에 글의 내용은 신영복의 관계론에서 非근대의 요건들을 엮어내는 것에 그 중심이 있다. 고로 이 글은 신영복의 관계론을 전체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인간적인 삶과 사회를 꾸려갈 수 있는 실천적 방법론을 엮어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확인 작업이다. 다시 말해서 관계론을 대변하지도 않으며 신영복의 관계론이 조직론이라고 아울러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글이 신영복의 관계론에 대한 전체적 의미나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충분한 평가가 결코 될 수 없음을 미리 밝혀두며, 다양한 재구성의 가능성 역시 열려있음을 환기시켜 둘 필요가 있다. 서론에서 다루는 근대와 본론의 사상, 자유, 주체역량, 연대, 변방 등의 논의되는 범위는 관계론의 범위와 그것의 이해를 위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신영복의 각 의미들은 非근대를 조직해내는데 있어 그들의 자리를 찾아갈 것이며 그 자리에서 각각의 의미들은 새로운 역할을 얻을 것이다. 이들의 관계와 영향은 서로에게 ‘非근대’ 적 변화를 이끌어 낼 것임을 이글에서는 가설하고 있다. 즉 非근대적인 삶, 인간적인 삶을 조직하는 결로 이 글은 엮어질 것이다. 관계론이 인간적 삶을 조직함을 확인하는 작업은 담론의 성격 및 유의미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글의 짜임 : 非근대에 필요한 요건들을 신영복의 관계론에서 추출하여 재구성한다. ‘블록놀이’가 연상되어지는 방식으로, 인간적인 삶을 조직함에 있어 필요한 요건들을 관계론에서 추출하여 재구성한다. 하나의 블록은 블록을 쌓는 이의 상상에 따라 집의 지붕이 되기도 하고 자동차의 몸체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세계를 완성시킨다. 이렇듯 이 글은 신영복 관계론의 문장과 단락의 부분들이 非근대의 요건으로 그대로 옮겨와 자리한다. 그리고 그 뜻과 표현은 실천적 조직의 역할로서 보존되어진다. 짜임의 방식이 이러한 이유는 글의 시각과 범위에서 조건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문학적인 글의 형식과 내용으로 담겨진 그의 담론을 해체하거나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이글의 성격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담론이란 장(場)에서 인간적 삶을 조직하기 위한 요건의 블록들을 모아 非근대라는 세계의 가능성들을 형성하는 것이기에, 그의 목소리를 살리는 것이 글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적합한 방법이겠다. 글의 순서 서론의 첫 부분은 근대적 삶에 대한 기본적인 지적으로, 신영복이 말하는 근대는 무엇인지에 대한 배경적 서술과 그것의 모순을 기준으로 하여 대비되는 非근대에 대한 개념적 설명이다. 본론에서는 본격적으로 신영복 담론인 관계론을 그의 사회사상으로 보고 이에 그가 일컫는 사상이란 것을 정리한다. 관계론의 지반이 된 신영복의 삶과 마르크스와의 대응점들, 그리고 동양사상에서 영향 받은 부분들을 정리해 본다. 그 다음으로는 관계론이 非근대를 조직하는데 있어, 그 요건들을 내포하고 있음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즉 非근대의 출발선과 그 방향성으로, 신영복이 말하고 있는 자유와 성찰, 그리고 인간의 이해라는 중심적인 의미에 대하여 살핀다. 이를 바탕으로 非근대를 조직하는 구체적 내용에 접근한다. 이것은 주체적 역량에 대한 이야기이며 연대와 변방의 설명이다. 본론으로 다룬 것들을 인간적 삶을 조직하는 것으로서 정리하고, 관계론의 유의미성을 오늘에 자리매김하는 것을 결론으로 한다. 2. 선행연구들과 대비하여 신영복에 관한 선행연구로는 그의 서예관에 대한 김은숙과 김성장의 글이 있다. 전자는 다소 단편적인 시각이긴 하나, 신영복에 대한 학문적 접근의 첫발을 내디딘 점에 의의가 있겠다. 「신영복의 삶과 서예관에 관한 연구」(김은숙, 2004)라는 김은숙의 연구는 신영복의 서예관이 형성된 과정을 살피면서 그의 서예정신이 그 삶과 통일되어 있음에 주목하였다. 김성장은 「신영복 한글 서예의 사회성 연구」(김성장, 2007)를 통해 신영복의 서예 중 한글 서예의 내용과 형식 미학에 있어 시대의 저항 정신과 민중적 감수성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분석하였다. 특히 신영복의 서예는 동양고전의 사상이 이론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과 사회변혁의 감수성을 서예의 형식으로 발전시킨 점을 신영복 한글 서체의 특징으로 보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부분은 ‘신영복의 서예에 대한 평가(김성장, 2007: 50-57)’에 대한 것인데, 대체로 기존 서단 내에서가 아니라 서단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지적하며, 서단이 신영복에 대한 거론을 기피하는 이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눈에 띈다. 서예 평론가 정충락의 인터뷰를 통해 그것이 ‘사대주의적 관점이며, 서단에 우리 글씨가 없는 것 또한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모순된 현실을 김성장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비단 서단의 경우만이 아니라 우리 학계의 상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3) 결론에서 김성장은 신영복의 남다른 이력과 학문적 깊이가 서품과 인품의 일치로 녹아져 있으며, 그것이 토착성과 예술성, 시대성과 대중성이란 특징을 가진 신영복 서예의 독특한 미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역시 서예뿐만 아니라 신영복의 전반적인 학풍 및 삶의 성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기에 사회학이나 인문학, 혹은 서예 같은 특성 분야로 그를 담아내기에는 그 일면적 한계를 담보해야 한다. 한편 이들의 연구는 모두 신영복 서예관의 원천인 그의 담론, 관계론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않거나 서예관의 형성과정으로서 간단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글에서는 신영복의 관계론을 사회사상적인 범위에서 정리해보고 거기에서도 인간적 삶을 조직할 수 있다는 방법론적 확인 작업을 할 것이다. 그 방법론은 인식과 실천이 받침 되고 서로 조응함으로써, 그 시대성과 보편성, 그리고 대중성 및 예술성을 모두 품고 있음을 부차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이것은 그의 담론의 태생과 주체(정체성) 그리고 성격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신영복의 삶과 사상이 응축되어진 관계론에 대하여 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볼 필요성이 전제된다. 이런 이유로 관계론의 지반적인 내용이 더 충실하게 채워질 것이고, 그것의 사상적 맥락을 드러내는 것과, 인간적 삶을 조직하는 실천적 구성틀로 그의 담론이 어떻게 재구성되어 쌓여지는지를 보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앞선 논문들과 더불어 학문적 영역에서의 상보적인 역할을 할 것이며, 더 나아가 실천적 영역에서 또한 신영복의 담론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를 발전시키는 데 일조하길 기대한다. 1. 근대 1) 근대 (1) 근대의 역사 신영복의 관계론에서 논해지는 근대의 범위와 성격을 알아보는 것에 앞서 일반적인 근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근대는 서양의 역사를 중심으로 중세와의 대비 속에서 정의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근대의 성격들을 형성하게 된 중세에 대하여 먼저 간단히 살펴보고 이것의 반동으로 생긴 근대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중세의 세계관은 신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었으며 따라서 신의 말씀을 연구하는 신학이 모든 학문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에 존재란 신의 창조물이며, 신의 말씀이 진리였다. 이에 인식이란 그 말씀에 도달하는 것과 동일했다. 이런 점에서 중세는 경제적인 면에서 볼 때 봉건영주가 지배하였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는 신과 성직자들이 지배하던 시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종교적인 삶의 기준으로써 오히려 사람을 저버리는 결과를 낳은 천 년 간의 중세는 14-16세기를 거치는 르네상스를 통해 다시금 잃어버린 사람을 찾자는 흐름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의 시대에는 특히 새로운 실험정신의 활발한 모습들을 볼 수 있고, 과학혁명이라 불리는 이 실험정신은 수많은 중요한 발명과 발견을 이루어내기도 한다. 한편 중세의 종교관이 무너지고 타 민족과의 교류가 이뤄지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다시 철학의 핵심문제가 된다. 이에 신의 성에 갇혀 있던 중세시대의 피폐해진 사람들의 인간적인 삶의 욕구는 신의 절대적 진리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근대를 잉태하게 된다. 중세를 넘어서는 이런 시대적 상황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기술의 혁신적인 발달로 더욱 급속한 변화에 놓이게 되는데, 개인의식의 성립과 과학의 발달, 교역의 확대로 인한 도시의 성장과 경제구조의 변화 등으로 본격적인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들은 근대의 성격을 말해주는 중요한 부분들이라 하겠다. 이런 서양의 역사성을 내장하고 있는 근대성(modernity)은 오늘날 어떤 시기를 지칭하는 연대기적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특징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정의되어지고 있다. 근대를 보기위하여 중세에 대한 범주를 매우 한정적으로 대비시켰지만, 그것이 중세의 진실을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사용된 현대와 고대의 중간이라는 중세라는 이름 자체가 의미하듯, 중세에 대한 폄하된 부분에 대한 지적(Gutberlet, 2008: 81-86)4)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기원 후 500년부터 1500년 사이의 천 년이 단지 극복되고 넘어야 하는 어둠의 시기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에 대한 오늘날의 과분한 관심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중세 시대에서 물려받은 미덕과 장점은 의외로 쉽게 잊혀져있는 듯하다. 중세 역시 우리가 근대적 시각에서 벗어난, 다양한 입장과 관계론적 관점으로 재조명해야할 역사일 것이다. (2) 근대의 특징과 그 주체 서양에서 출발한 근대성은 자유와 규율에 관한 이중적 사고를 전제로 한다(김진균·정근식, 2000: 20). 근대성 담론은 초기에는 자연적 질서에 대한 과학적 추구, 정치적 혁명에서의 자기결정, 경제적 행위에서의 자유로 이어지며, 이를 보증하기 위한 것이 근대적 제도들에 관한 것들이었으나 이후 이런 제도들이 갖는 속박의 측면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그 모순들이 담론화 된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측면에서 근대성을 논하는데, 특히 근대성이라는 범주를 자본주의라는 모습에 두는 것은 이글의 문제의식에 그 준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시각은 다양하다. 마르크스처럼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초점을 둔 시각도 있으며 버만(Marshall Berman)5)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에 그 무게를 더하는 해석도 있다. 신영복이 말하고 있는 근대는 그것의 특성으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해 주목할 뿐 아니라 그 특성들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비인간적 삶에 대한 유력한 혐의자로서 위치하고 있다. 그의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은 발전보다는 모순에 그 중심을 둔 마르크스에 가까운 정치 경제학적 입장인 동시에 비판적 사회철학을 내포한 문명론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가 포착한 근대성의 특징으로 대신하여 읽어내도 무방하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그것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형성된 종류의 문명으로 이해된다. 그는 부가 생산되는 바로 그 관계들 속에서 빈곤이 생산되고, 생산력의 발전이 일어나는 바로 그 관계들 속에서 억압을 생산하는 힘이 존재하는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성격(이기홍, 2010: 17)을 거침없이 파헤친다. 마르크스는 자본축적이나 시장을 통한 상품형태의 끝없는 확장으로부터 낡은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체하는 ‘생산의 지속적인 혁명화, 부단한 혼란, 영속적인 불안과 동요’를 근대성의 특징으로 포착해 낸다. 이런 불안정성은 과거는 물론이거니와 새로 생겨나는 것조차 미처 자리 잡기 전에 이미 낡은 것이 되고 마는 경쟁과 해체의 가속화를 촉진하고, 그로 인해 현재와 미래를 불안과 미지의 시간으로 경험하게 한다. 이렇게 150년 전의 마르크스가 이야기 하는 자본주의는 오늘날 신영복의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근대의 시간성은 중세 이후 현재를 포함하는 진행형일 뿐 아니라 경제 및 정치, 정신문화적인 영역까지 포괄하고 있는 공간성을 가지고 있다. 근대의 특징, 근대성은 그것의 주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그것이 전세계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형성된 문명의 주체에 대한 이야기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가와 작업을 자기목적인 양 여기는 노동자, 근대의 주체는 마르크스가 지목한 자본가와 노동자이다. 그러나 이들은 상반된 위치와 모습을 지닌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성 중심주의와 과학주의로 새로운 사고방식이 계몽주의라는 정치적 운동6) 속에서 펼쳐지고, 합리적 인간의 이상, 발전에 대한 낙관, 과학적 진리에 대한 신념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유와 평등은 모순적으로 관계 지어진 이들의 근대적 삶의 양식 속에서 만들어 진다. 근대의 주체 형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자료는 매우 구체적이고 통시적이다. 특히 그는 『자본론』Ⅰ권에서 새로운 인간의 생산을 위한 봉건적 집단들의 해체와 폭력적 토지수탈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에 대한 유혈적 입법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7) 푸코(Michel Foucault) 역시 『광기의 역사』(Foucault, 1991: 41-290)에서 17세기와 18세기 사이에 유럽에 불어 닥친 대감금의 열풍8)을 통하여 비이성적 행동은 비생산성으로 가치화 되어졌음을 추론한다. 인간을 가르는 기준은 한편으로는 노동력 보유의 여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 규율의 습득 정도였고, 정상적 인간상은 노동하는 인간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근대 권력은 새로운 정상인을 효과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한 섬세한 장치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처벌하고 감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근대적 인간의 모습은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말하고 있다. 근대적 인간을 위해서는, 개개인들이 규율9)에 복종할 수 있도록 분리된 공간에서 일과 시간표에 따라 훈련되어지고, 개개인의 힘과 능력을 권력의 목표에 부합할 수 있도록 일사불란하게 만들어야 함을 서술하고 있다. 사회적 인식으로서의 윤리와 규범, 벤덤(Jeremy Bentham)의 판옵티콘(Panopticon) 체계 등은 규율의 다른 모습들이다. 이를 통해 복종하면 할수록 더욱 유용해지는 인간형, 감시가 내면화된 인간, 스스로의 습관에 의해 복종하는 인간으로서의 개인, 그렇게 근대인은 제조된다. 결국 신과 절대 권력의 통제가 사라진 근대라는 권력의 배치 안에서 구성된, 지배를 내면화한 인간이 근대의 주체로 생산 되었다(Foucault, 1994).10) (3) 우리의 식민지적 근대성 그렇다면 우리의 근대는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국 사회의 식민지 경험이라는 변수와 맞물리면서 다양해진다.11) 식민지성과 근대성을 배타적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그에 대한 문제제기 또는 상호 병립의 가능성에 대한 재해석이 그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12)은 근대성 자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 근대화를 결국 성취되어야 할 과제로 파악하고, 자본주의 발전의 보편적 경로에 주목한다(김진균·정근식, 2000: 18). 이에 반하여, 이글에서는 서구 자본주의의 부(富)는 주변부 사회에 대한 약탈의 결과라고 규정하는(Wallerstein, 1985: 35). 월러스타인(Immanuel Wallerstein)의 관점13)에 유의미성을 둔다. 서양의 근대화는 그 내재적 계기14)로서 비서양 사회에 대한 식민지화를 요구하였고, 이 배제와 통합적 힘의 현실화는 식민지 내부의 또 다른 힘과 만나면서 표출되었다. 바로 여기서 식민지의 엘리트 혹은 지식인들을 주목하게 된다. 김동춘이 보고 있는 한국의 근대모습은 이런 맥락에서 읽혀진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정치, 경제 질서, 냉전과 분단으로 연결된 지난 100여 년의 역사는.... 지배 엘리트들이나 지식인들이 전통을 위로부터 제거한 과정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김동춘, 2000: 235-236).” 자신을 문명화하지 못한 집단으로 인식하게 된 식민지의 엘리트들은 ‘근대적 발전’에 대한 열망 속에서 저항과 순응의 양식으로 서구를 이상화된 대상으로 전화 시킨다. 이렇게 근대성의 특징적 힘들이 식민지 속의 힘들과 조우하면서 식민지적 근대를 만들고, 그것은 다시 근대성 자체를 강화해 나갔다. 그리하여 ‘식민지가 근대의 실험장’이 된다(강상중, 1997: 15 재인용). 효과적인 식민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효과적인 ‘식민지인’이 존재해야 했다. 일제가 가져온 근대적 질서에 적응할 수 있는 근대인으로서 개조할 필요가 있었다. 보통학교 체제의 확립을 통한 근대규율의 내면화와 1930년대에 진행된 공업화 과정은 노동자계급을 창출하였다(조형근, 2010). 전통적 가족 질서, 신앙 체계, 의료 체계가 붕괴된 곳에서 새로운 지식을 접하고 새로운 습관을 익힘으로써 새로운 질서에 적합해진 인간들이 생산되고 있었다.15) 동시에 이미 조선 후기부터 존재했던 자생적인 근대 지향성, 문명·개화의 논리로 한국인들 자신에 의한 근대적 주체의 형성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들 양자는 근대성의 정당성 자체를 의문시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근대성은 오랫동안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극복의 대상이다.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으로서 그것은 미래의 기획으로서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성찰되고 인식해야 할 것으로 현재적이다. 2) 근대의 세계관, 존재론 근대와 근대적 주체에 대하여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들을 잉태한 서양의 사고방식 혹은 세계관은 어떤 것일까? 신영복에 따르면 근대성의 특유한 사고방식은 세계를 존재들의 집합으로 인식하고, 모든 존재와 존재들 간의 관계가 경쟁적이며 각자의 존재성을 배타적으로 키워가려는 운동을 한다고 본다. 이를 그는 존재론적 세계관이라 부른다. 존재론에 대한 탐구는 서양의 철학사를 열어보는 것과 다름없다. 근대철학의 색인을 찾아 들어가 보자면,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의미의 코기토(cogito)에 대해 말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는 ‘나’라는 존재를 신의 피조물로 본 중세적인 관점과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것으로써 중세와 근대의 경계선은 바로 인간에 대한 관점의 전환인 것이다. 중세의 인간은 신의 창조물로서 신의 말씀이 곧 진리(확실한 지식)이고 이를 따라야 하는 수동적인 주체다. 반면 데카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나’라는 자아가 자신의 능력으로써 확실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며,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인간 자신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자연에 대한 지식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즉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나는 신으로부터의 독립 된 주체로서 ‘중세를 벗어나는 사고’인 것이다. 따라서 ‘주체’라는 범주는 근대철학에서 가장 중심적이며 근본적인 범주이다. ‘주체’없는 근대철학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주체라는 말에는 언제나 ‘객체’ 혹은 ‘대상’이라는 짝이 따라 다닌다. 왜냐하면 내가 ‘사고하는 주체’라면, 이 주체가 사고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철학의 출발점인 주체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피조물인 자연세계로부터 인간이 분리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럼으로써 이후의 근대철학으로선 진리, 즉 주체가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가 된다. 진리야말로 주체에서 출발한 근대철학이 어떻게든 도달해야 할 목표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라는 범주를 독립시키자마자 진리라는 범주가 중요하게 따라다니게 된다. 요약하면 주체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요, 진리는 그 목표점이다(이진경, 2011: 44). 이 두 개의 범주는 근대철학 전체의 기초와 방향을 특징짓는 가장 근본적인 범주이다. 또한 이것은 근대철학의 모든 질문 자체가 그것에 매일 수밖에 없었고, 그에 대한 대답 역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지반이었던 것이다. 존재론은 근대의 모태이기도 하고 서양 철학16)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훑어본 것처럼 근대적 세계관은 한때 새로운 문명 건설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고 그것이 출현할 당시의 국면에서는 진보성을 담지 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세계관이 정착된 뒤로 보수화, 반동화한 것도 사실이다. 신영복의 관계론이 마주하는 존재론은 이렇게 고대와 중세를 지나 근대로 넘어오는 곳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고대의 자연과 나의 관계에 대한 고민, 혹은 중세의 신과 나의 관계에 대한 고민의 안에 있던 나라는 존재는 중세를 넘어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을 맞이하면서 자연과 신이라는 우물을 뛰쳐나와 ‘나의 확장’이라는 존재론적 방식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특히 ‘나의 확장’은 자본주의 시대인 근대사회의 세계관으로서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 간의 관계방식이다. 즉 존재론적 세계에서는 모든 존재와 존재들 간의 관계가 경쟁적이며 각자의 존재성을 배타적으로 키워가려는 운동을 말한다(신영복, 2002). 이러한 존재론적 논리는 자본축적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관철되고 있는데, 특히 신영복에게 있어 존재론은 자본주의 200년사를 철학적 패러다임으로 정리한 것으로서 더 나아가 근대성의 바탕이 되고 있는 철학적 사고의 구조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라 하겠다(신영복, 1999). 2. 근대의 모순 신에 대한 인간의 반란은 빈곤의 생활을 풍요롭게도 하였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유나 평등 같은 가치들을 보편적 가치로 인식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경제적 면에서는 산업혁명이란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자본주의라는 구조를 강고히 하게 하였다. 자본주의는 보통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를 말하지만 오늘날은 경제체제 뿐만 아니라 정치 및 사회, 문화 등의 모든 영역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의미한다. 1) 자본주의의 구조 마르크스의 생산영역의 구조 분석을 바탕으로 하여 신영복은 생활영역의 구조적 변이를 설명한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이기에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사회이다. 즉 자본주의의 모든 것은 ‘상품’으로 존재한다(Marx, 2007a: 43)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품의 가치표현 형태는 역사적으로 등가물→일반적 등가물→화폐라는 발전과정을 거쳐 왔다17). 화폐가 출현하면서 상품사회의 문화와 의식구조는 상품구조로부터 화폐구조로 전환된다. 생산물뿐만 아니라 생산적 활동 그 자체에 대하여도 화폐가 권력을 행사한다. 쉽게 말하면 돈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그것을 얻고자 사람들은 아등바등 한다는 것이다. 점점 화폐의 세상이 되어가면서 화폐화 될 수 없는 생산물이 그랬던 것처럼 화폐화 되기 어려운 생산 활동은 점차 소멸 된다. 자신의 능력을 화폐화 할 수 없는 사람은 도태된다. 이제 생산능력보다는 생산물을 화폐화 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자본주의사회가 상품사회라고 하는 것은 결국 화폐권력이 군림하는 사회라는 의미와 다름이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역시 이러한 화폐권력을 기본 구조로 하고 있다. 근대사회의 기본구조는 초월적 권력을 갖는 화폐권력 구조와 다름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 상품과 화폐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신영복, 2009: 7)고 신영복은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최고의 상품인 화폐를 상품화하기에 이른다. 화폐는 자본이 되고 자본은 자기증식이 그 본질이다. 상품에서 화폐로, 화폐에서 자본으로, 그리고 자본으로부터 자본축적으로 나아가는 필연적 경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법칙적 인식인 것이다. 신영복은 이런 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적 언어를 인문학적으로 풀어��는다. 특히 인간의 삶에 있어 자본주의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 구조가 일상적 의식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다. “상품과 화폐’18)는 우리를 맹목이 되게 하는 가장 상징적인 것이며, 이것은 일단 상대방을 묻지 않으며 못 보게 합니다. 자기가 만든 물건을 소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만든 사람을 만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과 인간이 단절되는 물신성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입니다(신영복, 1998).”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이러한 불안정성, 특히 그 축적과정의 최고단계인 금융자본주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도 그 기본에 있어서는 존재론적인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개별적 존재가 서로 관계하기보다는 경쟁하고 승부하는 관계, 즉 다른 것들의 희생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신장해가는 존재론적인 구조와 운동 원리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유용한 물건이라도 안 팔리면 가치 없는 상품이다(Marx, 2007a: 106-165). 팔려고 하면 먼저 소유 또는 사유라는 개념이 있어야 한다.19) 상품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팔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것을 만들고 쓰는 사람의 인간적인 어떤 면모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적인 정체성이나 인간적 가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신영복, 2010). 그 예로 신영복은 미(美)에 대한 이야기를 든다. 미(美)라는 것이 아름다움인데, 그 어원은 앎이다. 그 반대어로는 ‘모름다움’이 된다. 그러나 상품미학에서는 이게 전도돼 있다. 이미 아는 것은 아름답지 않고, 모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에 대한 동경, 자기 것에 대한 역정, 비하의식, 상품미학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새로 나오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품을 사람들이 사고팔기 위해서 오랜 기간 교환과 저축의 의식을 키워야 하고 사회적 구조가 만들어져야 하고 그 속에 사는 동안에 우리 스스로가 상품이 되고 인간적 정체성이 완전히 박탈되고 등신같이 돼 있고, 상품이 오히려 등가물에서 일반적 등가물(general eqivalent), 화폐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것은 상품으로서 잘 팔려야 하고, 그래서 학문도 학교도 잘 팔려야 하는 이런 결정적 구조 속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라는, 적나라한 현재의 모습을 그는 정곡으로 가리키고 있다. 2) 자본주의의 모순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은 경쟁이란 법칙으로 확대재생산 과정이며 이것이 자본주의 그 자체의 동력인 동시에 모순이 된다. 우리가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이런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하여 마르크스의 생산영역에 관한 연구내용을 바탕으로 한, 신영복의 요약을 두 가지로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본축적은 노동을 소외시키고 노동계급을 궁핍화하는 과정이다(Marx. 1987: 54-68).20) 자본축적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한다. 이는 기계화로 나타나며 노동자의 수를 감소시킨다. 자본 축적은 이처럼 노동자가 항상적인 실업위험에 놓이게 된다. 노동자의 자율성은 줄고, 종합적인 노동능력도 잃게 된다. 그런데 자본축적이 노동을 소외시킨다는 사실에 ��어서 가장 역설적인 것은 노동이 자본을 축적한다는 사실이다. 바로 축적의 주체가 그 축적의 결과로 소외된다는 사실이다. 즉 소외구조를 재생산한다는 것인데, 자본축적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재생산한다는 사실이다. 자본축적과정은 풍요의 과정으로 인식되나 내면에 있어서 노동자계급의 ‘궁핍화’과정이 아닐 수 없다. 궁핍화의 의미는 물질적 소비수준이 낮아진다는 개념이 아니라 종속화의 의미이다. 노동의 지위가 열악해지고 노동의 자율성이 침해된다는 의미이다. 세계적인 실업문제, 비정규직의 양산과 취업자의 불안은 물론이며, 국제경제의 수탈적 구조와 빈곤층의 광범위한 확대현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욕망을 양산하고 경쟁을 유발시키는 근대사회의 속성으로서,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둘째, 자본축적은 불균형의 누적과정, 이윤율저하의 과정21)이며 공고((Marx, 1990a: 251-309)와 독점화((Marx. 1990a; 1990b: 407-730)의 과정이기도 하고, 이것은 패권화의 과정으로 연결된다. 자본축적은 재생산과정22)이기 때문에 당연히 균형이 요구되고 가치에 있어서의 균형과 개별생산물의 종류와 양에 있어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자본축적과정은 무정부적일 수밖에 없으며, 원천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을 전제로 한다. 총자본량의 증대는 ‘더 많은 이윤량’과 ‘더 낮은 이윤율’을 동시에 만들어 낸다. 또한 소비 없는 생산이 가능하게 되고 균형이 깨지는 시점에서 불균형상태가 되는데, 이것의 누적인 공황은 자본축적과정의 독특한 중단과 혼란이다. 그것은 또한 생산부문간의 불균형과 생산-소비간의 불균형이 폭력적으로 조정되는 과정이며, 열위(劣位) 자본이 탈락하는 독점화의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결국 해외로 그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게 되고 자본축적→독점→대외팽창이라는 필연적 과정을 밟게 된다. 독점자본의 대외팽창은 자본축적의 내재적 모순이 발현되는 과정이다. 그것은 제국주의이며 패권주의이고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식민지화, 세계화이다. 자본은 축적할 ��밖에 없는, 자기증식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기에, 엄청난 생산력 증대를 가져왔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삶을 소외시킨다. 이런 모순은 정책적 대응에 의해 해결될 수 없는 것이며 같은 질서 내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해체에 의하여 해소되는 성질의 것이다. 여기서 신영복은 소외개념에 대하여 강조를 한다. 주체가 완전히 배제당하고 억압당하는 역설적 구조인 자본축적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가 근대사를 바라볼 수 있는(신영복, 2010)관점이 되기 때문이다. 신영복은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뿐 아니라 그로인해 유발되는 현 사회의 모순들에 대하여 더욱 세심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우리가 일상적이고 표피적인 문제로 느끼는 자본주의적인 과잉생산을 포함하는 물질적 낭비에 대한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의 낭비, 관계의 파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적 낭비는 그래도 작은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낭비보다 더 심한 낭비가 바로 인간의 낭비입니다. 인간��� 낭비, 쉽게 떠오르는 것이 실업과 최근에 당면 과제가 되고 있는 고용조정입니다. 부패보다도 더 심한 인간의 낭비, 인간성의 유린입니다. 자본주의체제가 양산해내는 가장 심각한 낭비는 인간의 낭비, 인간성의 완벽한 유린입니다. 이러한 낭비의 가장 심각한 형태가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입니다. 인간관계 자체가 변질되고 와해된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신영복, 1999).” 그는 오늘날 우리가 다른 존재,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를 보지 못하는 존재론적 사고에 갇혀 있기에, 개인 간이든 회사와 회사 간이든 나라와 나라 간이든 비극적인 일들이 청산될 수 없다고(신영복, 1998b) 본다. 이런 객관적인 구조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전망을 하고 어떤 모색을 해야 할 것인가? 신영복은 우리들의 사고와 삶 그리고 사회구조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인식의 기초위에서 미래의 담론들을 ‘관계론’적 전망과 패러다임 위에서 새로이 건설해가야 한다(신영복, 1998b)고 이야기 하고 있다. 3. 非근대 1) 非���대23) “현재를 A라 한다면, 이 A가 갖고 있는, 우리시대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모순, 부조리, 갈등 이것을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실천적 노력, 그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를 A라 한다면 미래는 非A입니다. A가 아닌 것, A가 갖고 있는 이러저러한 모순 구조를 재구성한 것, 그게 바로 미래입니다. 미래는 현재와 다르지만 그것은 B, C, D가 아닌 非A입니다.”24) 앞에서 논의했듯이, 근대의 범주를 자본주의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은 전화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다. 근대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이 내재되어 있는 현재이다. 그 현재가 A라면, ‘A는 근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는 현재인 A의 모순과 갈등이 해체되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해체’는 뚝딱 만들어지는 완성품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근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내가 내일의 아주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신영복의 표현처럼 오늘 덮고 자는 이불 안에서 내일을 맞이하기 때문이다(신영복, 1990a). 삶은 변증적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축적되는 것이지 밖에서 오는 어떤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하기에 현재 A는 탈의처럼 한 번에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상관없는 B나 C같은 새로운 무엇으로 단번에 갈아입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미래는 非A, 즉 非근대다. 그것이 탈근대로 후인식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는 非근대’라고 말 할 수 있다. 탈근대는 근대의 비판으로 시작된 하나의 흐름이지만, 그 방향은 너무 다양하고 그 간극이 매우 크기 때문에 하나로 정의되기 어렵다.25) 혹자는 근대적 주체와 진리의 해체로 현재가 탈근대, 즉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해체 후는? 신영복은 미래에 대한 담론들이 목적론처럼 모델화 하여 제시되는 것에 강하게 경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부터 정해놓는 것은 화(和)가 아닌 동(同)적인 존재론적 시각인 것이며, 어떻게 완성될지 모르는 다양한 발전과 열림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하나의 모습도 아니며 또한 일면적이거나 직선적인 어떤 것이 아닌, 변증적인 운동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 동시에 그 과정 자체이다. 그 과정은 모순을 기준으로 하여 해체되고 다시 재구성되어진다. 이것이 관계론적인 그의 관점이다. 그러하기에 현재를 근대적 사회로 보고 그로부터의 모순들과 갈등을 정확히 직시하는 것, 그 모순들과 갈등을 비판적 성찰을 통해 해체하는 과정이 그에게는 미래를 향한 실천의 출발인 동시에 그 미래를 이야기하는 서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표로 정리해보면 단선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인식과 실천의 관계론적 성격들은 서로의 영역을 교집합하고 있으며 물론 그 영역들 역시 막혀 있지 않다. <표 Ⅱ-1> 非근대의 위치 : 근대와 탈근대 사이 (관계론적 인식과 살천의 담론 형성표) 담론성격 인식 실천 인식 담론영역 근대 非근대 탈근대 담론내용 주체철학 이분법, 동일성 자본주의 과학주의 계몽주의 비인간주의 자유, 성찰, 인간이해, 연대, 변방 등의 요건들로 근대의 모순을 해체하고 재구성하�� 실천 및 인식 해체되고 있는 혹은 해체된 근대 그 이후 非근대? 근대가 아니면 전근대인가, 그렇지도 않다면 탈근대라는 뜻인가? 근대라는 말 자체가 시기적인 구분이 포함되기에 전근대-근대-탈근대라는 계열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표 Ⅱ-1>은 근대와 탈근대 사이에 非근대라는 새로운 공간이 자리 해 있다. 익숙한 담론적 영역에서 非근대의 위치를 설정해 보는 것은 그것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한다. 근대와 탈근대를 논하는 내용들은 인식론적 성격의 담론들이다. 주체나 대상, 진리 등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관한 것으로 근대와 탈근대의 경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非근대는 인식과 실천의 영역 모두를 내포하고 있다. 근대의 모순에 대한 반작용으로 탈근대가 꿈틀거리고 있다면, 그것은 인식의 영역에서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근대나 탈근대 모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근대나 탈근대는 순식간에 변화할 수 없으며 인식의 전환만으로도 변화되지 않는다. 변화, 그���은 실천적 활동의 영역이다. 또한 미래를 포함하고 있는 현재이며 동시에 역동이다. 그러나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담론의 공간은 이를 주의 있게 관찰하지 않는다. 신영복은 그 비어있는 공간을 인지한다. 근대에서 탈근대를 향하는 변화에 대한 그의 살핌은 인식의 영역뿐 아니라 실천의 영역 또한 포함하고 있다. 그가 非근대라는 영역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거나 탈근대와 따로 논의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非근대의 자리를 굳이 별개로 꺼내와 근대 및 탈근대와 나란히 놓은 이유는 그의 사상적 맥락에서 ‘실천’의 자리에 대한 주목의 효과이며, 관계론의 시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신영복의 담론에 어떻게 배여 있는지에 대한 들여다봄이다. 그의 사상은 뒤에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기에 여기서 결론적으로만 명시한다면, 인식의 원천인 실천에서 시작되어 실천에서 완성되어진다. 그래서 그 존재형식 또한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탈근대는 인식론적 담론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위의 ��관계론적 인식과 실천의 담론 형성표’의 구성 원리다. 그의 담론에서 이야기되는 탈근대에 대한 지향점은 결코 인식론적 영역에서만 논해지는 부분이 아니다. 인식뿐 아니라 실천의 쌓임과 어우러지는 작용이 그의 사상적 운동법칙이기 때문이다. 신영복은 오늘날을 제대로 직시하고 그것의 모순을 극복하는 힘은 밖이나 미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내부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모순을 우리가 근대성이라 아우른다면 非근대는 이런 근대성이라는 모순들을 해체하고 과거의 경험들과 그 안의 우직함을 동력으로 삼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가 아닌 非근대의 현재를, 즉 현재안의 새로운 현재, 곧 미래를 만드는 과정, 그 실천이 ‘非근대’라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非근대는 근대의 모순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천이며 인식’이다. 근대에서 탈근대로 향하는 걸음에서 신영복의 담론은 非근대라는 실천의 영역을 거쳐야 한다. 근대를 인식하고 그것을 非근대의 실천의 공간을 통하여 다시 탈근대로 인식되���지는 일정은 그의 사상형성의 흐름이며 담론형성의 원리이다. 이렇게 새로운 실천적 담론의 지형은 머리 만으로의 탈근대, 지식인들이 점유하는 탈근대가 아니라, 발로 내려오는, 민중의 삶으로도 그릴 수 있는 영역으로서, 그의 담론은 영역의 확대와 실제적 변화를 담보하고 있다. 그러므로 非근대라는 영역은 전근대-근대-탈근대라는 상식적 인식의 지형을 탈주하여 생명점으로 새로운 공간을 연다. 2) 非근대의 지반 非근대를 향하는 신영복의 관계론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非근대의 지반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정리해보자면, 자본주의의 환상과 논리 깨트리기, 미래는 외부로부터 온다는 구도 같은 식민지적 문화 깨트리기, 그리고 이상주의와 낭만주의의 역할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통합적 사고에 대한 것들이 있다. 신영복의 표현을 빌자면 ‘근대적 문맥’에서 깨어나기가 非근대의 지반이 되는 내용들인 것이다. 이것들은 그 실천과 더불어 동시에 진행되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깨기’26)는 새가 알에�� 깨어나는 것처럼 또 다른 세상을 향하여 건너야 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非근대는 인식이기도 하고 실천이기도 하다. 또 그것들의 다양한 어우러짐으로 인한 새로운 상태이기도 하다. 근대적 문맥이 우리의 일상과 구조에 얽혀있듯이 非근대의 내용 역시 단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닐 것이다. 근대의 모순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천이라는 ‘非근대’의 개념은 다른 표현으로 ‘깨어나기'이며 신영복의 표현대로 ‘근대문맥 넘어서기’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말처럼, 태어나려면 누구든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그랬던 것처럼 신영복이 우리의 非근대에 대한 담론에 살며시 꽂아준 갈피의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1) 자본주의의 환상과 논리 깨트리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것은 재화와 노동력 그리고 우리 자신까지도 가치형태, 즉 상품으로 존재한다. 상품에는 자신의 본질 즉 정체성이 소멸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용가치를 갖는 경우조차도 그것은 하위��념으로서 교환가치의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도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사람의 인격이 소멸되는 이런 구조적 원리가 매우 비인간적이란 것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연봉 1억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이 등식의 비인간적 의미를 읽지 못하게 된다. 이렇듯 우리는 자본주의 환상 속에서 당연한 듯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기’는 ‘자본축적의 모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동의어이다. 근대에 대한 환상에 대한 자각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근대의 환상 속에서 우리의 본질, 인격을 소멸시키는 바로 그 근대를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력을 향상시킨다는 기계화는 오히려 노동자가 항상적인 실업위험에 놓이게 하고 종합적인 노동 능력도 잃게 한다. 뿐만 아니라 노동 및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구조를 재생산하는 환상이다. 그로 인해 노동계급은 풍요가 아닌 궁핍화로 가속화 되고 빈곤층은 광범위하게 확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조에서의 불균형적인 생산과 소비는 성장이란 명목으로 지속적으로 추구되지만 오히려 자본주의의 독특한 혼란인 공황을 일으키는 환상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신영복은 자본주의 역사는 풍요의 역사였는지, 세계적인 규모에서 봤을 때 과연 풍요로운지, 빈곤, 무지, 환경, 질병, 부패 이런 것들이 과연 200년 동안 효과적으로 해결되어 왔는지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하며, 이러한 형태의 자본축적운동이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있어야 된다(신영복, 1999)고 말한다. 신영복은 자본주의 환상뿐 아니라 자본주의 논리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속도, 성장, 번영에 대한 무비판단적인 지향, 목적과 수단에 대한 생각 등은 非근대를 위한 전환이 요구된다고 본다. 효율성과 전문성에 대한 신화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특히 종합적인 판단의 부재를 낳는 기능적 전문 지식인의 육성은 지나친 속도, 효율성, 전문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애의 단적인 예로 볼 수 있으며, 인간을 바라보는 근대의 시각을 여실 없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인간 자체로서의 목적이 아니라 생산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일에 있어서도 관계론적 시각에서 볼 때 목표는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반대로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표이기에 목표보다는 그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 타당한 시각인 것이다. (2) 식민지적 문화 깨트리기 “현재가 A라 한다면...‘현재’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과거 봉건사회도 있고 현대자본주의 사회도 있고 미래지향적인 대안적 사회도 물론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잡한 갈등구조를 어떤 형태로든 지양해 나가려는 실천적 의지 속에 미래가 非A라는 형태로 열리는 것이지요.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지요. 현재와 아무 상관없는 이질적인 B, C, D 이런 것들이 밖에서 온다는 의식구조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실천이나 의지가 완전히 무장해제 당하고 있는 격이지요. 이러한 생각이 바로 식민지문화의 일반적 구조입니다. 저는 이런 인식구도를 깨뜨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장지숙, 2011).” 미래는 글자 그대로 未來인가? 그렇다면 그 未來란 것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신영복은 어디선가 이미 완성된 미래가 존재하고, 그것이 여기 이곳으로 다가온다는 구도가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를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담론의 문제점은 미래의 어떤 실체가 현재를 향하여 다가오는 구도로서, 현재와 미래의 엄청난 비대칭성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타자인 미래를 주체화하고 주체인 현재를 타자화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종속화(從屬化)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이러한 시각은 기존의 보수적 구조를 은폐하고 급속한 변화의 이미지를 가시화하고 있다(장지숙, 2011)는 신영복의 예리한 지목이다. B, C, D를 타자로 규정할 경우 A가 곧바로 B, C, D로 전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는 A의 내부모순에 운동성을 강화하는 과정을 거쳐 A가 非A로 지양되는 유기적이고 변증적�� 과정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A가 바로 B. C, D로 전이된 사례는 정복과 식민화 같은 국가 간의 사례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또 개인적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그런 경우의 변화를 미래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 신영복이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역사나 삶의 연속성을 전제하지 않는 미래담론에 대한 문제성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가 위에서 감지되어진 정복과 식민화와 같은 전이과정, 그러한 단절의 역사를 겪어왔기 때문에 소위 BCD담론을 특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장지숙, 2011)이 신영복의 견해다. 그러하기에 현재인 근대에서 지양되는 非근대의 지반, 즉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실천이나 의지의 지반은 종속적인 미래관에서 깨어 나와 우리의 현실에 뿌리를 내린 독립적이고 주체적이어야 하며 이것은 동시에 현재의 근대성을 해체하고 非근대를 향하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기 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의 근대적 특수성에 대하여 신영복은 보다 더 냉철한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한국사��의 특수성 그것은 한 마디로 종속성(從屬性), 다른 말로 하자면 중심부를 향한 열등의식이다. 화폐가치가 패권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문화적 지형 역시 중심부의 근대적 가치가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당연히 우리의 교육목표와 가치는 비주체적이고 종속적인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사회의 엘리트 재생산과정 그 자체가 종속적인 것으로 구조화되고, 정치적 종속과 경제적 종속 그리고 엘리트 충원구조 그 자체마저 종속적 체계로 완성되는 단계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단계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바로 사회의 구조화된 콤플렉스, 열등감이다. 신영복은 한 사회가 문화적 열등의식에 갇혀 있는 경우 그 사회에는 합리적인 가치를 제시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인 문제 해결능력 그 자체가 소멸한다(신영복, 2007a)고 본다. 신영복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구조적 모순과 그 안에서의 한국 근대적 특수성으로 인한 개인과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콤플렉스, 즉 열등감에 대하여 통찰적으로 직시��면서도, 근대에 대하여 섣부른 대안 역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내용임을 덧붙이고 있다. 이것 역시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 근대성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3) 이상주의, 낭만 그리고 통합적 사고 뜬금없이 이상주의(理想主義)와 낭만이라니. 그러나 글의 맥락을 따라 이들의 상대어를 연상해 보자면 이성주의와 합리성 정도가 될 듯하다. 물론 사전적 의미의 반대어는 따로 있겠지만,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근대적 사고원리인 존재론적 세계관에 물들어 있는 우리의 사고를 반성하고 그에 상반되는 非근대의 인식틀이 되는 창의적 사고, 인문학적 상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한다. 우리는 대개 이상과 현실을 분리하지만 불가능한 꿈들이 현실과 맞서는 힘이 될 때가 있기도 하다. 또 몇 년 전의 수첩에서 지금의 내 모습이 희망으로 적혀 있음을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이상이라는 것도 오래 살다보면 현실의 다른 표현일 수 있음을 가끔 경험하기도 한다. 신영복은 노래, 배추씨앗, 노동자, 수첩 등 우리가 대상, 즉 현실을 본다는 것은 대상이나 현실의 불변성을 넘어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과거와 미래를 아울러 보는 것이라 한다. 그는 이를 ‘통합적(holistic) 사고’라고 일컫고 있다(장지숙, 2007). 통합적 사고의 시각에서는 ‘이상’이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과 튼튼히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상의 본래의 의미는 현실을 끊임없이 개선하고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다이호우잉27)은 말했는지도 모른다(戴厚英. 2005: 277). 현실은 그 속에 이상을 담고 있다. 신영복은 이런 현실과 이상을 잘라내는 자체가 근대적 사유인 분석임을 각성시킨다. 이상과의 관련성 속에서 현실을 보는 태도, 그것이 큰 것과 작은 것,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들을 유연하게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기에 철학적 추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을 같이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신영복, 2010). 하나 더 보태어, 신영복은 이상과 현실의 결합 외에 더 중요한 또 하나가 낭만과 창조성이라고 말한다. 낭만성은 이상주의의 구성요소의 하나로서 기존의 체제, 양식 이런 것들이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장애물로 변할 때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정서라는 것. 낭만의 이러한 자유로움이 이상과 마찬가지로 힘겨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기도 하며, 숨통을 틔워주기도 한다고 본다. 그는 비록 이상주의나 낭만이 사회인식에서 논리성도 부족하고 실천에서 치열함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열정은 모든 운동의 초기형태에 필요한 소중한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상주의나 낭만이 현재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또 매몰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 상황의 모순이나 한계를 잘 드러내 준다고 본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표현을 빌려 오늘의 당면과제를 조감할 수 있는 그런 ‘독립(Jaspers, 1996)’일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는 논리성, 과학성 이러한 담론도 사실은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문맥이라고 보고 이에 이상주의와 낭만은 현실의 모순을 장기적인 시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유용하다28)고 읽어내고 있다. 그래서 시적 관점, 시적 정서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적 관점은 대상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게 하고, 이런 통시적이고 투시적인 관점은 사물과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신영복, 2010). 이렇게 이상주의와 낭만의 역할은 우리가 갇혀 있는 근대문맥에 맞대할 수 있는 관계론적 미래관의 인식론적 방법으로써 새로운 자리를 매김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 조건과 실천주체의 정서마저 무시되어지는 관념성과 도식성이란 이상주의의 결함에 대해서도 신영복은 놓치지 않고 있다. 非근대를 위한 지반에 대하여 간단히 추려보자면 우선 시대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서의 자본주의의 환상과 논리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 미래에 대한 식민지적 구도와 개인과 사회에 내재돼 있는 콤플렉스 깨기,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게 구사해오던 어법과는 다른 어법으로 자기를 열어가는 세계인식, 즉 이상주의와 낭만주의에서의 창의적 에너지에 대한 인식으로 볼 수 있겠다. Ⅲ. 신영���의 관계론 1. 사회사상 1) 사상 그리고 실천과 이론 신영복은 사상(思想)이란 따뜻한 가슴(warm heart)이라고 정의한다. 일반적으로는 사상은 냉철한 이성(cool head)이라고 이해되고 있으나 그의 사상은 마음 즉 정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상은 어떤 사회나 인생 따위에 대한 통일된 판단 체계나 일정한 인식체계이다. 그런데 신영복이 말하는 사상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사상이라는 뜻을 살필 때에 생각한다는 뜻으로 풀이되는 사(思)는 한자의 모양처럼 밭을 생각하는 마음, 곧 노동의 마음이다. 그는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시간들과 공간으로 깊이 들어가 그 안에서의 꿈틀거리는 의미를 현재로 생환시켜 들어 올려내고 있다. 노동이라는 단어의 생명점을 찾아낸 것이다. 그의 사상은 밭을 돌보는 농부의 마음(思)으로 그것에 어우러지는 것들(想)이 바로 사상이 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오늘날은 예전처럼 농사가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니 그 뜻을 조금 더 여유롭게 넓혀보자면 노동 혹은 생활에 대한 그리��� 그와 어우러지는 것들의 쌓임이 곧 사상인 것이다. 그러니 머리의 작업으로만 생각하는 사상과는 달리 신영복의 사상(思想)은 발과 가슴까지 연이어서 일어나고 반응하여 쌓여지는 일들을 일컫는다. 그에게 사상은 머리가 아니라 실천에서 출발하고 또 실천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사상은 단지 생각하거나 판단하거나 혹은 추리를 하는 식의 머리만의 작업이 아니라, 그 생각한 것을 실천으로 쌓고 생각과 실천이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사상의 내용과 형태는 실천이라고 신영복은 정언한다. 사상의 존재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이다. 사상은 실천의 결과가 이론으로 정리되고 이것이 다시 실천의 재료가 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몸과 마음에 체화되어 그 사람의 생각과 실천뿐 아니라 감성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신영복, 1996b). 그러하기에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한 개인의 육화된 사상이 되지 못한다(신영복, 2006a: 509).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로서 가슴에 갈무리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슴에 이르게 되는 실천의 여정이 감성으로 피어나는데, 그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사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에 혹은 사명이기 때문이라는, 이성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하지 않으면 자기가 불편한, 양심의 가책이 되는 그런 정서적 내용을 갖는 것이다(신영복, 1999).29) 그러기에 사상의 최고의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서 ‘가슴’에 갈무리되어 있는 것이다. 신영복의 사상은 추상적 관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발로 설 때 이루어진다. 이런 삶의 결론이 곧 사상이자 논리인 것이다(신영복, 1989). 신영복의 사상은 실천뿐 아니라 이론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실천과 이론의 관계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자면, 실천이란 이론의 궁극적인 종착지다. 실천을 통해서 그 진리성 여부가 검증되기도 하고 실천의 결과가 이론으로 다시 재정리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게 다시 실천 과정에서 진리성이 검증되는 변증법적인 통일과정 속에 있게 되기 때문에 실천의 문제가 가장 궁극적이라고 신영복은 보고 있다. 왜냐하면 실천이 곧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이다(신영복, 2007b). 한편 이론이란 그 자체가 항구성을 갖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어떤 주체가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고 조직하며 또 어디서부터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신영복, 2007b)라고 한다. 실천과 이론 그리고 사상의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사상은 세계에 대한 참여의 방식이며 절대적인 불변의 성격이 아니다(신영복, 2007b). 신영복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 기존 지배 이데올로기를 학습하거나 수용, 혹은 포섭되어지는 형식으로 우리의 의식이 이루어지게 되는 점을 자각하고 우리의 의식을 주체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신영복, 2006c). 이런 이유로 그는 실천, 사상, 이론의 고유한 자리를 찾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물이나 인식을 더 복잡하게 하는 지식, 실천의 지침과 실천과 더불어 발전하지도 않는 이론은 질곡(桎梏)이며(신영복, 2007b), 이론이나 진리 자체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불변하는 별처럼 우리가 사랑하기만 되는 이론이나 진리는 없다. 오히려 이론이란 세계에 대한 참여의 방식이자 세계를 조직하는 것이라고 그는 덧붙이고 있다. 2) 사상을 민중 곁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 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이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삶과 사상의 어느 쪽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라는 방법상의 문제는 그 사람의 처지에 따라 그 사람의 할 나름이겠지만, 삶을 내용으로 하고 사상을 형식으로 하는 상호작용의 법칙성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삶의 조건에 먼저 시각을 돌려야 하리라 믿습니다. 실천과 삶의 안받침이 없는 고매한 사상을 문제 삼아야 하리라 생각됩니다(신영복, 2005: 297-298).” 신영복의 사상과 우리가 통상 인식해 온 사상과의 구별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애국독립운동을 하거나 정치적 이름을 남기는 사람, 많은 공부를 하여 ���문적으로 높은 치적을 쌓은 사람, 혹은 역사적으로 전기(傳記)적인 훌륭한 이들만이 전유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온 사상의 자리30)를, 신영복의 사상은 평범한 삶을 짓는 우리의 이웃, 나의 벗과 가족들의 삶에서도 읽어낼 수 있고 명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상의 본래의 의미와 자리를 민중31)에게 되찾아주는 사건인 동시에 민중들의 삶에 대한 보다 적합한 가치32)를 부여할 수 있는 열린 해석이며 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로 인해 사회의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주체들로 자리매김 되고 비로소 그들의 입장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본래 민중의 곁에 있었던 사상의 본연의 자리를 되찾아주는 것뿐만 아니라 비로소 민중 각자의 삶이 주체가 되는 사회가 이루어지고 그 사회가 다시 그들의 역사를 만들 수 있는 선언이다. 그의 사회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의미는 그가 겪어온 사회와 그의 삶이 녹아 있는 것과 동시에 그와 같이 한 민중의 자리가, 민중의 모습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민중은 누구인가, 우리 사회의 민중은 어디에 있는가? 신영복은 민중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한 그 시대, 그 사회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당대 사회의 생생한 현재 상황 속에서 민중의 진정한 실체를 발견해내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의 대립, 현실의 왜곡, 사실의 과장, 진실의 은폐 등 격렬한 싸움의 현장에서 민중의 참모습을 발견해내고 그것의 합당한 역량을 신뢰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가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민중’에 대한 왜곡된 오늘의 자리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상과 연민이 만들어낸 민중이란 이름의 허상이 우리들을 한없이 피곤하고 목마르게 합니다. 그것은 ‘왜 불행한가?’라는 불행의 원인에 대한 질문으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하는 ‘눈물의 예술’로 그 격이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은 위안을 줌으로써 삶을 상실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이란 결코 어디엔가 기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라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응달의 불우한 사람들이 곧 민중의 표상이 아님은 물론, 여기에는 감상주의의 오류가 있습니다. 민중은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입니다(신영복, 2005: 292-293).” 이러한 역량은 단일한 계기에 의하여 단번에 나타나는 가벼운 것이 아니며, 장구한 역사 속에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 환희와 비탄의 기억들이 거대한 잠재력으로 묻혀 있다가, 역사의 격변기에 그 모습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당대의 모순 위에서 창조적 에너지로 응집되고 증폭 되어지는 것이 민중이라는 명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삶의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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