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창백한손 두꺼운손이 맞잡는 세상...

「나의 삶 나의 생각」 1993 07 12 경향신문 창백한 손 두꺼운 손이 맞잡는 세상... 신영복 성공회 神學大교수 어느 명절날이었거나 제사 때였다고 기억된다. 나는 삼촌이 건네주는 국그릇을 무심코 받다가 덴겁을 하고 그만 그릇을 떨어뜨린 기억이 있다. 삼촌은 질겁하고 있는 나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삼촌의 손에서는 아무렇지도 않던 국그릇이 나의 손에서는 불덩이였다. 어른 손과 아이 손의 차이였다. 삼촌은 그 차이를 이용하여 어린 조카인 내게 장난을 걸었던 것이다. 삼촌이 자랑스럽게 내밀어 만져보게 한 삼촌의 손은 크고 두껍고 투박하였다. 나무껍질 같았고 땅바닥 같았다. 농사꾼이던 삼촌의 손은 다른 모든 농사꾼의 손과 마찬가지로 괭이나 호미와 같은 농기구였다. 「士一工一口寸」의 기억 내가 초등학교 2, 3학년이던 때의 일이고 보면 당시의 삼촌은 마흔을 넘긴 어른이었다. 손의 차이는 당연히 나이의 차이였다. 그러나 이 차이는 내가 그 후 삼촌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좁힐 수 없는 차이였다. 삼촌의 모습은 세월이 흐를수록 내게는 우상처럼 문득문득 떠오른다. 언젠가 시골의 삼촌 댁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삼촌이 나를 뒤란으로 데리고 가서 당신의 이름을 한자로 써 보여주신 적이 있다. 그 이름 석 자는 삼촌이 쓸 수 있는 유일한 한자였는지도 모른다. 땅바닥에 써놓은 이름 석 자 중에서 가운데 자인 목숨 수(壽) 자는 획수가 많기도 하지만 앞뒤 두 자에 비하여 크기가 갑절이었다. ‘사이리하고 공이리가 구촌인기라’ 목숨 수(壽)자를 쓰시면서 입속으로 뇌이는 말이었다.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사이리하고 공이리가 구촌인기라’ 아마 서너 번은 되뇌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노랫가락 비슷한 곡조에 실린 것이었다고 기억된다.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것도 훨씬 훗날의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士一工一口寸」. 그것이 복잡한 목숨 수(壽)자의 획을 기억하는 주문 같은 가락임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훨씬 훗날의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목숨 수(壽) 자를 쓸 때마다 어김없이 ‘사일이하고 공일리가 구촌인기라’를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어린 조카에게 당신도 한문을 쓸 수 있음을 알리려 했던 삼촌의 마음이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뭉클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소위 독서계급에 속해버린 나를 각성케 하는 꾸중처럼. 징역살이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징역 살자면 더러 험한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에 당연히 손이 거칠고 투박해진다. 뿐만 아니라 몇 년을 계속 구둣일을 하던 때에는 손가락과 손바닥에 제법 넓게 굳은살이 박힌 적이 있었다. 손바닥을 비비면 다른 소리가 났다. 옛날의 삼촌 손만은 못하지만, 결코 창백한 흰 손은 아니었다. 창백한 인텔리의 손을 결별하고 이제 자기의 사회성분을 개조해 낸 이른바 자기변혁의 뿌듯한 성취감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삼촌의 두꺼운 손과 그 덴겁했던 국그릇이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그때의 삼촌이 되고 싶었고 또 된 듯도 하였다. 징역 살며 하얀 손과 결별 교도소의 식사대형은 각 공장의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는 먹자골목의 좌판 같은 긴 식탁에 마주 보고 앉는 2열 또는 4열의 긴 횡대이다. 그래서 저쪽 끝에서 보내주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위로 위로 건네준다. 대개는 좌판 위로 밀어서 전달한다. 어쩌다 소기름국 같이 뜨거운 국이 나오는 때, 나는 옆 사람을 덴겁시키는 작은 장난을 한다. 이를테면 시침 뚝 떼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 뜨거운 알루미늄 국식기를 옆 사람에게 건넨다. 옆 사람은 무심결에 받다가 아 뜨거라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엉뚱한 이야기를 걸면서 건네기도 한다. 이러한 장난은 모처럼 기름국을 먹게 되는 행복(?)한 식탁에 어울리는 장난이기도 하다. 나는 뜨거워 혼겁을 하고 있는 옆 친구를 40년 전 삼촌의 얼굴이 되어 바라본다. 실은 나도 뜨거운 국 식기를 참느라고 속으로 안간힘을 쓰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평소에 수시로 손을 단련시키기도 하였다. 난로 연통이나 작업용 인두 같은 것으로 틈틈이 연마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장난은 물론 그야말로 한낱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질없는 장난 속에는 옛날의 그 득의 연한 삼촌의 웃음을 내 것으로 갖고 싶은 나의 그리움이 깔려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손의 이야기가 아니라 창백한 인테리의 손을 결별하는 자기개조의 간고한 노력의 일단이면서 동시에 두꺼운 손, 건강한 삶을 향한 그리움과 발돋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삼촌은 나에게 당신의 한자 실력을 과시하지 않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삼촌은 그의 건장하고 당당한 체력만으로도 내게는 이미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고향마을에는 당나무 밑 넓은 마당에 언제부터인지 전해 내려오는 큼직한 돌이 하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정확한 무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 1백kg은 더 나가는 돌이었다고 생각된다. 계란처럼 양쪽이 빠지고 가운데가 부른 차돌이었다. 마을의 모든 사내아이들은 자라 청년이 되면서 누구나 이 돌을 들어보는 것이다. 이 돌을 안아 올려 어깨 위로 넘겨야 한 사람의 장정 대접을 받는, 이를테면 성년의식의 제구(祭具)인 셈이다. 당시 쉰을 바라보던 삼촌이 이 「들돌」을 내게 들어 보인 것은 물론이다. 건장한 삼촌 흠모의 대상 들돌을 들기는커녕 땅에서 떼지도 못하는 나를 앞에 세워놓고 젖가슴까지 들어 올려 보인 후 젊었을 때에는 어깨에 메고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는 무용담을 잊지 않았다. 힘이 장사던 윗대의 어느 할아버지 말고는 당신만큼 들어 올린 사람이 동네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삼촌의 신봉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촌은 아무래도 부족했던지 나를 뒤란으로 데리고 가서 예의 그 이름자를 써 보인 것이었다. 교장 선생의 아들로 자란 나에게는 아무래도 문자로서 승부를 해야 한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돌솥비빔밥이나 김치찌개 냄비를 만나면 곧잘 장난기가 동해온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장난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여운이 내내 나를 슬프게 한다. 20년의 형옥을 치르고 감옥을 나오던 날 나를 가장 흐뭇하게 안 받침 해준 것이 있다면 아마 이 두꺼운 손으로 상징되는 자기개조의 성취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20년의 형옥을 치르고 난 후에야 얻을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잃거나 버리고 난 후에야 얻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自尊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존의 손은 함께 어깨동무하던 이웃을 떠난 지금, 내게는 이웃과 함께 떠나 버리고 없는 과거였다. 민중의 역사적 현장에 뛰어든 수많은 실천가들이 끝내 해내지 못한 것이 바로 자기의 성분개조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지식에 의해서 구분되는 계급이 자본에 의하여 구분되는 계급보다도 더욱 골이 깊고 끈질기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창백한 손과 책으로 대표되는 계급 구분이 최후까지 남는 계급의식인 것이다. 자본은 그 사회의 하부구조인 생산수단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상부구조인 지식까지 소유하며 이러한 지식의 소유는 자본의 소유보다 더욱 끈질긴 규정력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침 조간신문 한 장을 손에 들고서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일상생활의 도처에서 흔전으로 만날 수 있는 진리이다. 아무튼, 이제 삼촌이 타계하신 지도 이미 오래고 나 또한 형옥을 함께하며 동고동락하던 친구들을 떠나 낯선 서울에서 낯선 골목을 더듬고 있다. 감옥을 나설 때의 그 뿌듯하던 자기개조의 성취감도 묽을 대로 묽어져 다시 창백한 흰 손을 아침마다 비누로 씻으며 겨우 돌솥 비빔밥그릇에다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 뿐이다. 다시 창백해진 손으로 자신의 성분개조, 그것은 결코 혼자서 얻을 수도, 혼자서 지킬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동고동락의 어깨동무 속에서 싹트고 신뢰와 애정의 포용 속에서 지탱되는 한 포기 여린 풀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어느 개인의 품성이 아니라 내면화된 인간관계의 철학일 따름이다. 인간관계 속에서 생(生), 존(存)하는 집단의 품성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개조의 높이 역시 함께 어깨를 짜는 길동무들의 키를 넘지 못하는 것이며, 잔디밭의 잔디 한 포기의 키를 넘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키가 같을 때에만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줄 수 있을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나는 사(士)일이와 공(工)일이가 9촌간이면 너무 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3촌, 2촌 그리고 언젠가는 무(無)촌으로 만나야 할 동전의 양쪽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양쪽이 만나기 위해서는 단지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노력만으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러한 노력이 꾸준히 견지되고 이윽고 결실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토대와 문화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사일이와 공일이가 무촌으로 만나는 일이야 말로 학습과 노동이 예술로 승화되는 길이며, 우리 사회의 공동체를 만드는 길이고, 남과 북의 민족 모순을 통일해 내는 길이며, 그리고 21세기의 문명을 고뇌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어느 곳에 나의 삶을 터 닦으며 누구와 함께 어깨를 짤 것인가. 이것은 비단 나만의 과제가 아니라 잃어버린 우리의 자존을 되찾는 길이며 언젠가 이승의 문을 열고 떠나갈 때 우리를 최종적으로 규정하는 삶의 이야기이며,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들의 역사로 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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