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노회찬, '마음의 스승' 신영복을 만나다

노회찬, '마음의 스승' 신영복을 만나다 [노회찬 OOO를 만나다] '미완의 기록'으로 본 노회찬과 신영복 (1)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2019.01.15 09:45:09 노회찬은 항상 '영감'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등졌지만, 세상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은 노회찬재단과 함께 '노회찬 OOO를 만나다' 연재를 시작합니다. 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은 정치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점에서, 같은 생각을 품고 있다고 봅니다. 노회찬이 만난 사람, 노회찬의 생각, 노회찬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노회찬재단과 함께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마음으로부터 모시는 스승입니다. 저에겐 아직 스승을 평가할 자격과 능력이 모자랍니다. 신 선생님의 말과 글, 활동에서 저는 한 시대를 고뇌하는 실천가의 진수를 보아왔습니다. 선생의 사상과 철학은 금방 적장의 목을 벨 듯한 단호함과 엄중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체온을 따뜻하게 담고 있습니다. 이론과 사상이 이처럼 자신의 삶과 실천에 잘 녹아 있는 경우를 저는 일찍이 보지 못했습니다." - <노회찬-정운영이 만난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랜덤하우스중앙, 2004, 124쪽)에서 노회찬이 신영복 선생에 대해 한 말. 3년 전인 2016년 1월 15일 오늘은 노회찬이 '마음의 스승'으로 존경한 신영복(申榮福) 선생님이 75세의 나이로 먼 길을 떠난 날이다.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고 1988년 8월 14일 특별가석방된 신영복은, 출소 10년 후인 1998년 3월 13일에 사면 복권으로 공민권을 회복, 18년 가까이 자유인으로 산 뒤 세상을 떠났다. 2016년 1월 7일 노회찬은 후원회장인 조국 교수와 점심을 같이 한다. 헤어진 뒤 얼마 있다가 그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신영복 선생님이 위중하신 것 같다는 거였다. 노회찬은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 목동 자택으로 방문, 이생에서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을 한다. 며칠 뒤 노회찬은 그날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며칠 남지 않았다는 전갈을 받고 황급히 댁으로 찾아뵌 것이 열흘 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연명치료를 받지 않는 환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특유의 평온하고 온화한 표정에 간간이 미소를 머금으며 오히려 저를 격려하셨지요. 이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의 만남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면서도 선생님은 걱정 말라고 더 건강해지겠노라고 약속하셨고, 저도 다시 뵙겠다며 평소처럼 헤어졌습니다. 그 후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만, 막상 비보를 접하니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가는 길이라지만 선생님! 어찌 그리 바삐 가시려 합니까? 선생님께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큰 스승이셨습니다(경향신문, 2018.1.18.). 다가오는 헤어짐의 시간,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트위터에 헤어짐의 시간이 점점 더 다가오고 있는 것을 직감했는지, 사흘 뒤인 1월 10일 밤 노회찬은 트위터에 신영복의 시화 여덟 작품을 잇따라 올리는 것으로 "마음의 스승"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표한다. <2016년 1월 10일 오후 10시 3분 트위터>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은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위로입니다. 몸이 차가울수록 정신은 더욱 맑아지고 길이 험할수록 함께 걸어갈 길벗을 더욱 그리워합니다. <오후 10시 9분 트위터> 참된 자유(自由)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갖는 것입니다. -신영복 <오후 10시 12분 트위터>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영복 <오후 10시 26분 트위터>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 합니다. 사상(cool head)이 애정(warm heart)으로 성숙하기까지의 여정입니다. -신영복 <오후 10시 31분 트위터>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밝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신영복 <오후 10시 40분 트위터>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자 어느 깨어있던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오후 10시 56분 트위터>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신영복 <오후 11시 16분 트위터> 머리좋은 것이 마음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좋은 것이 손좋은 것만 못하고 손좋은 것이 발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신영복 1월 16일 밤 노회찬은 두어 시간 전 영면에 든 신영복을 생각하며 트위터에 글을 쓴다. "신영복 선생님!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8일 전 하직인사 드리러 갔을 때 제게 말씀하셨죠. '걱정마세요. 더 건강해질게요.' 그날 이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비보를 접하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선생님!" 그리고는 밤 12시경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궁극에 처하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열립니다. 열려 있으면 오래 갑니다. 변화와 소통이 생명입니다." 등 두 개의 시화를 트위터에 올린다. <1월 16일 새벽 12시 2분 트위터> <1월 16일 새벽 12시 6분 트위터> "선생님의 뜻과 얼은 늘 저희와 함께 할 것입니다." 1월 16일 오후 2시경 노회찬은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대학성당에 차려진 빈소에 조문한 뒤 '청년 신영복'을 만나게 되고 사진과 함께 트위터에 글을 올린다. 성공회대학교에 마련된 신영복 선생님 빈소에 조문하고 나오는 길에 만난 청년 신영복입니다. 선생님의 뜻과 정신은 낡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진보의 미래입니다. 1월 17일 오후 3시와 1월 18일 오전 9시 40분에도 노회찬은 트위터에 신영복의 시화를 올린다. 고인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지 않았을까 싶다. (1월 17일 오후 3시) 세상에다 자신을 잘 맞추는 이른바 '지혜로운 사람'보다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세상은 조금씩 변화해 왔다. -신영복. (1월 18일 오전 9시 40분) 이 마음과 다짐을 노회찬은 이렇게 적는다.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더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선생님께서 즐겨 하신 이 말씀은 무엇보다 당신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람의 중요성, 특히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변화와 소통의 중요성도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에다 자신을 잘 맞추는 이른바 '지혜로운 사람'보다 세상을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세상이 조금씩 변화해 왔다는 잊지 못할 지적을 하셨습니다. 특히 물의 철학, 흐를수록 낮은 곳을 향하고 점차 넓어지면서 마침내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물, 바다에 이른다는 말씀으로 이 시대의 참된 진보가 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뜻과 정신은 낡은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할 새 진보의 미래입니다. (경향신문 2016년.1.18.) 1월 18일 오전 11시 노회찬은 성공회대학교 대학성당에서 열린 영결식에 참석한다. 영결식은 고인이 즐겨 부르던 동요인 '시냇물'을 함께 부르며 마무리됐다. 감옥살이를 함께 한 죄수가 만기 출소를 하게 되면 건빵이라도 사서 조촐하게 파티를 하게 되고 건빵 한 봉지씩 나눠받으면 분위기는 훈훈해지고, 감옥살이 20년간 만기 출소하는 사람을 위해 한사코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부른 노래가 동요 '시냇물'이라고 한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신영복은 누구? 한 언론에서 "온몸으로 감당한 시대의 고통을 사색과 진리로 승화시킨 시대의 지성인"(연합뉴스, 2016.1.16.)으로 일컬은 신영복은 동양고전학자이며 사상가이자 빼어난 문필가이며 서화 작가다. 감옥에서 쓴 편지를 모아 엮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1988년 출간된 후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엽서>(1993), <더불어 숲 1, 2>(1998), <나무야 나무야>(1996), <신영복의 엽서>(2003),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2004), <처음처럼>(2007), <청구회추억>(2008), <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2015) 등 출간하는 책마다 공감과 감명을 주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기 성찰, 냉철한 사회 현실 분석, 세계인식에 관한 깊은 사색과 폭넓은 사유로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한글 서예로도 그는 일가를 이뤘으며, '신영복체' '쇠귀체' '어깨동무체' '연대체'로 명명된 그의 글씨체는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고 있다. '한 폭의 글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 '획의 성패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는 것'. 서체의 특징에 대해 그가 한 말이다. 신영복은 1941년 8월 23일(음력 7월 1일)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밀양이지만, 출생지는 의령이었다. 일제 말기의 암울한 시절, 그가 가진 희망은 일본 총독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조선이 독립되고 일본을 식민지로 삼게 된다면 일본을 다스리는 조선인 총독이 된다는 얘기다. '일본 총독'이 꿈이었던 신영복은 1968년 통일혁명당(약칭 통혁당) 사건으로 20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다.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는 지하당을 조직, 국가 전복을 기도하려다가 적발 검거된 가칭 「통일혁명당 지하간첩단」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1968년 7월 25일 중앙정보부에 체포된 신영복의 이름도 158명 검거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개인별 피의내용은 신영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영복(27.육군중위.서울상대 졸.숙대 강사. 육사 교관) ①66년 2월 김질낙에게 포섭 ②학생청년지도책을 맡고 이종태 노인영 박성준 이수인 이영윤 등을 포섭(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 (경향신문 1968.8.24.) ▲ 동아일보(1968.8.24.) ▲ 동아일보(1968.8.24.)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는 혹독했다. 신영복은 통혁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었다. 또 현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그가 북에 갔다올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저들은 북에 갔다온 날짜를 대라고 구타와 전기고문을 하여 까무러치기도 했다. '무기수 신영복'은 이렇게 탄생했다(한홍구, 「신영복의 일생을 사색한다 - [기고] 한홍구 교수가 돌아본 신영복 선생의 삶」, <프레시안>, 2016.1.16.). 육사교관으로 현역 장교 신분이었던 27세의 청년 신영복은 1심과 2심인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각각 구형과 선고, 그리고 군법회의의 형 확정 절차인 관할관 확인을 거치며 모두 여섯 번이나 자신의 이름에 사형이라는 무거운 꼬리표가 붙는 것을 들어야 했다. 1969년 11월 11일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 환송, 무기징역이 확정된 것은 1970년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 왼쪽부터 경향신문 (1969.1.16.), 동아일보 (1969.7.24.), 경향신문 (1969.11.12.). ▲ 왼쪽부터 경향신문 (1969.1.16.), 동아일보 (1969.7.24.), 경향신문 (1969.11.12.). 신영복은 육군교도소를 거쳐 1970년 9월 안양교도소로 이감됐다가 1971년 2월 대전교도소로 이감돼 꼬박 15년을 살다가 출소한다. 1989년 12월 24일 인민노련 사건으로 체포된 노회찬은 서울구치소를 거쳐 1990년 안양교도소로 이감됐다가 늦가을 가랑비가 간간히 내리던 흐린 날 청주교도소로 이감돼 1992년 출소한다. 두 사람은 20년의 시차를 둔 안양교도소의 이른바 '(깜)빵 동문'였던 것이다. 기결된 뒤 수감됐던 안양교도소의 0.7평 감방은 신문지 넉장반의 크기. 국회 법사위원이 된 노회찬은 2004년에 국정 감사 할 때 다시 그 곳을 찾았다. "그 작은 방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끔찍해요. 아직도 그 방이 그대로 있어요"라며 그는 입술을 혀로 축인다(<민중의소리>, 2007.7.20.). 노회찬-신영복의 첫 만남: 「통혁당사건 무기수 신영복씨 옥중편지」 신영복은 한 인터뷰에서 대학 2학년 때에 있었던 4·19혁명과 다음해 5·16쿠데타가 자신이 사회변혁에 참여하고 결과적으로 감옥에 가게 된 계기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1년 재수 끝에 73년에 경기고에 입학한 노회찬은 의기투합한 같은 반 동료들과 함께 수유리 4·19묘소를 참배한다. 참배는 고교 2, 3학년 때까지 계속됐다. 노회찬은 "당시 4·19묘소 참배는 이후 30년 동안 제 삶의 뿌리가 됐다"며 "이후 자생적 운동권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노회찬과 신영복의 삶의 행로는 시·공간의 차이를 넘어 4·19라는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노회찬은 '마음의 스승' 신영복을 어떻게 만났을까? 첫 만남은 평화신문에 4회 연재된 무기수 신영복의 편지글을 통해서였다. 평화신문 원고의 경우 매수로 치면 90매 정도 되는 내용을 신문 한 면 전체에 실어서 보냈기에 당시로서는 상당한 분량이었다고 한다. 7월 10일 '수인(囚人)들은 늘 벽을 만납니다' 글로 시작된 연재는 '감방은 역사의식 일깨우는 교실'(2회)을 거쳐 총 4회가 실린다. 1주일여 뒤인 8월 14일 신영복은 석방된다. ▲왼쪽부터 평화신문 창간호 (1988.5.15.), 한겨레 (1988.7.15.). ▲왼쪽부터 평화신문 창간호 (1988.5.15.), 한겨레 (1988.7.15.). "사실 저는 (선생님이) 출소하기 직전에 <평화신문>에 연재된 '통혁당 사건의 무기수 신영복 씨 (옥중) 편지'를 가까운 분이 추천해 주셔서 읽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1988년 제 나이 삼십대 초반이었죠. 결혼하기 직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87년 6월항쟁의 산물로 선생님이 석방되시고 석방될 그 무렵에 연재 글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으로 나왔고요."(이경아, 「스토리펀딩 노회찬의 프러포즈,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 2016.12.26.) 신영복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된 뒤 20년 동안의 감옥생활을 통해 얻은 성찰과 사색의 편린들은 엽서로 정리돼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이 엽서들을 모아서 정리한 책이 바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책을 낸 햇빛출판사는 같은 통혁당 수감자인 오병철의 부인 윤일숙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초판은 애초 출소일에 맞춰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가석방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가족의 염려로 9월 5일로 맞춰졌다고 한다.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 알겠지만, 신영복의 편지글에는 읽는 사람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울림이 있다. 글이 굳이 누구를 깨우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조용히 읽은 사람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다. 훗날 한홍구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신영복은 감옥 안에서의 사색과 경험을 어딘가 기록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생각을 담아 둘 수 있는 그릇으로 한 달에 한 번 보내는 엽서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주제를 하나 잡으면 한 달 내내 감방 안에서 면벽 명상을 통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머릿속에서 교정까지 봐 두었다가, 엽서를 쓰는 날, 완성된 문장형태로 머릿속에 갖고 있던 것을 글씨로 옮겼다고 한다. 노회찬에게 최고의 책을 꼽으라면 그는 주저없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꼽는다. 구속되기 전에 출간되자마자 읽어보고 상당히 감동을 받았다는 이 책을 감옥에 가서 읽으니 한층 감동적이고 절절하게 와 닿았다고 한다. "나 같은 사람에게 굉장히 필요한, 나 개인만이 아니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해서…. 어디서 묻든 간에 그 책을 최우선으로 꼽죠."(<민중의소리>, 2007.7.20.). ▲ 한겨레 (1988.9.14.) ▲ 한겨레 (1988.9.14.) 노회찬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내용 가운데서 이것만은 꽉 잡고 읽으라고 권하고 싶은 글귀로 '상선약수', '하방연대'를 고른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라는 노랫말도 오랜 감옥 생활에서 지친 사람들이 바깥세상을 염원하면서 한 명 출소할 때마다 축가처럼 불러주던 노래였지만 이 가사에는 선생님이 늘 말씀하시는 '상선약수'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방연대'입니다. 노회찬-김지선의 인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나오자마자 저는 이 책의 전도사가 되어서 그때부터 선생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죠. 제가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이죠. 그 과정에서 아내 될 사람에게 편지 한 통과 함께 이 책을 선물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다음해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경아, 「스토리펀딩 노회찬의 프러포즈, 그리고 신영복 선생님」, 2016.12.26.) (※ 참고로 이전까지 노회찬이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었다.) ▲ 노회찬, 김지선 부부 (1994년 1월 1일 새해 첫날, 강원도 동해에서) ▲ 노회찬, 김지선 부부 (1994년 1월 1일 새해 첫날, 강원도 동해에서) 노회찬과 김지선은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도중 만났다. 1986년 노회찬은 프러포즈를 했지만 보기좋게 거절당한다. 1987년에 다시 만난 두 사람, 노회찬은 두 번째 프러포즈를 하고 성공하기에 이른다.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기도 해서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을 선물하면서 책 표지 안에 이런 말을 적었어요. '당신의 굳은 결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프러포즈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내 마음 역시 변함이 없습니다.'" 두 사람은 1988년 12월 17일 친구 이종걸의 피아노 반주로 '그날이 오면'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결혼을 한다. "내가 태어나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해왔는데 아직까지는 성공한 게 한 가지밖에 없어요. 결혼이에요. 아직까지 성공한 게 결혼밖에 없어. 세상에 이렇게 결혼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해요." 노회찬이 자주 했던 말이다. 노회찬, 마침내 신영복을 만나다 신영복과의 만남은 노회찬이 2여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1992년 출감한 뒤에 수소문 끝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지인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제가 92년도에 감옥에서 나왔을 때 제일 먼저 만나고 싶었던 분이 신영복 선생님이었습니다. 92년 4월에 나와 수소문해서 선생님과 연락이 되고 그간의 상황을 다 말씀드리고 그때부터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지요." "선생님을 처음 만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찾아가 뵈었더니 컴퓨터를 배우고 계셨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뵈었더니 이번에는 컴퓨터로 그래픽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원래 글씨도 잘 쓰시고 그림도 잘 그리시는데 굳이 붓 대신 컴퓨터로 그래픽을 하시는 게 의아해 여쭤보았지요. 선생님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나눠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시더군요." 왜 하필이면 컴퓨터로 그리시냐고 여쭈었을 때 주신 그 답변이 노회찬에겐 아름다운 인간의 향기로 오랫동안 남아있다고 한다.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면서 선생님을 통해 현실을 보는 시각이나 삶의 자세 등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 여쭙기도 하고, 또 그분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면서 제 마음을 결정하기도 하지요. 좋은 가르침을 주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신영복 선생님은 청년기 이후 사회생활하면서 만난 분 중 가장 마음으로 모시는 분입니다."(<국회보>, 2013년 1월호). 1996년 어느날 신영복은 노회찬-김지선 부부와 함께 북한산에 오른다. 신영복은 같은 해에 출간된 <나무야 나무야>(돌베개)에서 북한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한아름 벅찬 서울 껴안고 아파합니다-북한산의 사랑'에서). "북한산에 오르면 백두대간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발자국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노라면 600년 전의 한양(漢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이것이 내가 북한산에 오르는 이유입니다.…사람의 경우에도 중요한 것이 '가슴'과 '머리'의 조화라고 하였습니다. 따뜻한 가슴(warm heart)과 냉철한 이성(cold head)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사람은 비로소 개인적으로 '사람'이 되고 사회적으로 '인간'이 됩니다." ▲ <사회평론 길> 1996년 2월호, 149쪽 ▲ <사회평론 길> 1996년 2월호, 149쪽 14년 뒤인 2010년.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10월 18일 북한산 대동문에서는 난데없는 카드섹션이 진행되어 등산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진보신당 당원들과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모임 회원들이 참여한 케이블카반대 대책위원회, 가수 이현우의 팬클럽 회원들이 카드섹션의 주인공들이었다. 평소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이현우는 1인시위 뿐만 아니라 카드섹션에 사용될 그림을 직접 그리고 만장을 제작하는 등 북한산 지키기에 남다른 애정을 보여준다(http://www.1ung.net/34). 이날 자리를 함께 한 노회찬은 이런 비유로 인사말을 건넨다. "저는 국립대학보다 국립공원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얼마 전에 출간된 <노회찬의 약속>(레디앙, 2010.5.)에서 노회찬은 '아픈 서울'의 치유를 위해 "한강 살리기, 생명 살리기"를 약속한다. ⓒ김일웅 ⓒ김일웅 아마도 "나는 앞으로 더 이상 북한산을 오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북한산에게 미안하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기대어 쉬려고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염치없기 때문입니다."는 신영복의 심정과 같았을 거라고 본다. '일하는 사람들의 사상과 실천': 화이부동(和而不同) 노회찬과 신영복, 두 사람의 인연은 인터뷰나 외부 강연을 자제하고 있던 신영복(성공회대 사회교육원 원장)을 강연장으로 나오게 한다. 2002년 1월 17일 오후 연세대 신인문대 대강의실, 500여명의 청중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뤘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위원장이 '노동자 철학'에 대해 신년 강연을 해달라고 끈질기게 부탁해 17일 저녁에 하기로 했어요." 노회찬(민주노동당 부대표 겸 서울시당위원장)의 노력 결과 강연을 수락한 것이다. 강의에 앞서 노회찬은 "많은 독자들이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선생님이 오랫동안 추구하고 있는 세계관과 철학의 승리"라고 말한다. 신영복은 '일하는 사람들의 사상과 실천'이란 주제로 90분 동안 노동자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배와 흡수를 뜻하는 획일성의 동(同)이 아니라 공존과 다양성을 전제로 한 화(和)의 논리로, 운동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행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할 것"이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진보 자신이다. 지금 진보정당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진보'다. 부족한 진보를 훈장과 족보로 가릴 수는 없다. 세상을 진보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진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기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기 위해' 만든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노회찬, 작심하고 말하다>(비아북, 2014)의 '머리글: Quo Vadis, 진보?'에서 노회찬이 한 말이다. 이어 '3부 화이부동(和而不同) 부동이화(不同而和)'에서 노회찬은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 "21세기 최대의 히트 상품은 진보정당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끝나지 않은 실험, 거대한 소수전략'에 대해 말한다. "운동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행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할 것"이라는 신영복의 이야기는 'Quo Vadis, 진보?'의 '진보의 세속화'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보의 세속화란 낡은 운동권적 진보에서 벗어나 현실에 밀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정치의 영역을 활용하는 현실주의적 접근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회찬은 그 핵심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기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집약한다. (계속)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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