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대립과 갈등의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 프레시안 5주년 강연

대립과 갈등의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 프레시안 2006.09.26 색깔이 있는 기사글 "진지한 소통은 사라지고,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과 대립만 남아 있는 곳." 한국 사회에 대한 이런 진단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은 많다. 그렇다면 해법은? 쉽지 않다. 여러 사람의 지혜를 한데 모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널리 지혜를 구하여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는 것은 언론의 대표적인 역할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의 언론은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 했다는 목소리가 높다. 〈프레시안〉 역시 이런 반성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어디에서부터 문제를 풀어가야 할까? 이런 질문에 답하고자 애써 온 〈프레시안〉은 창간 5주년을 맞아 지난 21일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강연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신 교수는 이해관계의 대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소통이 가능하려면 우리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우선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런 성찰은 당장의 밥벌이와 무관한 인문학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신 교수는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도록 우리를 길들여 온 근대화의 과정 자체를 근본적으로 되짚어 볼 것을 주문했다. 모든 것을 화폐 가치로 단일화시킨 상품 사회가 근대화의 토대가 됐다고 지적한 신 교수는 목표의 달성만을 강조하는 '도로의 논리'를 넘어서는 '길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 근대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자기 존재를 배타적으로 강요하는 '존재론'의 패러다임이라며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관계론'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관계론의 철학이란 개인을 사회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파악하는 관점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론의 철학은 우리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면면히 살아 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시각이다. 신 교수는 또 세상에 순응하지 않는 우직한 실천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런 태도는 일견 어리석어 보이지만 세상은 이런 우직한 이들의 발걸음에 의해 바뀌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이 이런 우직한 이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취할 때 언론은 사회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직한 이들, 그리고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이 세상을 가장 깊고 넓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신 교수는 우리 사회가 소모적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진정한 통합을 이루려면 강물의 움직임에서 배움을 얻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항상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 결국 바다에 닿는 강물처럼 낮고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하방연대'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하방연대'의 길에 언론이 앞장설 것을 주문했다. 이날 강연은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이 뿜어내는 열기로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지난 21일 한국일보 본관 12층 강당에서 진행된 신 교수의 강연 내용 전문이다.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프레시안 〈프레시안〉창간 5주년을 축하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지금과 많이 다른 환경이었는데, 그렇게 어렵게 시작해서 5년 동안 고생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소개할 수 있는 매체가 됐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의 주제는 '대립과 갈등의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입니다. 이것은 창간 5주년을 맞는 〈프레시안〉에 대한 당부이기도 합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신뢰와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 왔던 〈프레시안〉이 앞으로도 이런 역할을 계속 해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나이든 사회, 그래서 고집이 세다 사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듯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은 굉장히 답답합니다. 누가 이야기를 해도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최근 언론에서 다룬 쟁점들을 되짚어 볼까요. 소위 전시 작전통제권, 한미 FTA 문제부터 심지어 헌재 소장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서로 합의해내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립과 갈등만 있을 뿐, 소통이 이루어 지지 않는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묻는다면 저도 참 답답하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속 시원한 방도가 없어요. 사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느끼게 된 것이 "나이 드신 분들은 굉장히 고집이 세다. 그리고 그 고집은 그 사람이 살아 온 삶의 결론이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 이것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쌓아 온 역사의 결론이라는 것이죠. 한국 사회를 가리켜 흔히 젊은 사회라고 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굉장히 나이 많은 사회예요. 지난 세월 동안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 온 사회거든요. 켜켜히 쌓인 세월의 무게를 지고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지요. 이렇게 나이 많은 사회라서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셉니다. 우리 사회가 처한 대립과 갈등의 문제를 풀어 가려면 이런 전제, 즉 "우리 사회는 무척 고집이 센 사회다"라는 것을 먼저 수긍하는 태도가 우선 필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김종철, 최장집, 박원순 등 우리 사회에서 아주 열띤 담론을 이끌어 가시는 분들이 참여하는 토론이 예정돼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도는 앞으로의 토론에서 다뤄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저는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내용에 국한해서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조금은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해관계만 놓고 대립하는 사회에서 인문학은 설 곳이 없다 제가 나눠 드린 유인물을 볼까요. 첫 번째 장의 제목이 '인문학과 소통의 장(場)'이죠. 며칠 전 고려대 교수 70여 명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어제(9월 20일)는 민교협에서도 지지 성명을 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래도 좋은가?" "인문학이 이토록 주변으로 밀려나 있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이 지속가능할까?"라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려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지요. 앞서 이야기한 교수들의 성명은 이런 공감대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인문학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는 우리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물음을 존중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최근 인문학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사실 인문학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며 그렇지 않은 곳은 매우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그저 비싼 음식을 내놓기만 하면 대접을 잘 한 것이라는 생각, 일인당 국민 소득이 2만 달러, 3만 달러로 오르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리라는 생각, 이런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인문학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중심에 놓인 것은 물질적 가치입니다. 하지만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가치를 잊고 있는 사회거든요. 그리고 이런 사회를 뛰어넘게 해 주는 게 인문학의 역할입니다. 가난한 이에게 인문학은 사치? 천만에! ▲ ⓒ프레시안 인문학의 의미와 역할에 관해 이야기할 때 꼭 소개하고 싶은 사례가 있습니다. 최근 저희 학교(성공회 대학교)에서도 시도하고 있는 것인데요. 클레멘트 인문학 강좌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얼 쇼리스라는 분이 처음 시작한 것이지요. 이 분이 뉴욕 형무소의 재소자들을 오랫동안 면담한 적이 있습니다. 각종 마약, 폭력 사범을 대상으로 진행한 일종의 워크숍 같은 행사에서였지요. 행사를 진행하던 도중 이 분이 아주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20살이 채 안 된 여성 재소자와의 인터뷰에서였어요. 그 재소자가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왜 우리들은 연극이나 음악회, 오페라와 같은 예술적 경험을 할 기회가 없는 거죠"라고요. 흔히 가난한 사람들 혹은 사회의 어두운 구석에 있는 사람들은 당장의 경제적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인문학은 그들에게 불필요한 사치라고 여기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은 당장 돈이 되는 내용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게 오히려 협소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얼 쇼리스는 빈민층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강좌는 지금까지 큰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당장 돈이 되는 내용이 전혀 아님에도 말이지요. 인문학이라는 게 물론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립과 갈등, 소통이 이루어지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바탕이 성숙하지 않은 사회는 이해관계만을 놓고 다투는 사회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기도 하죠. 앞서 이야기한 클레멘트 강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요. 인문학, 사회적 소통의 전제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학교 공부는 보통 '문,사,철(文,史,哲)'을 중심에 둔 것이었습니다. 당장의 경제적인 쓸모는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문학과 역사, 철학이 보다 완전한 인간을 기르기 위한 이상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게 어느 순간 사라졌습니다. 대신 돈이 되는 공부, 잘 팔리는 학문이 대학을 차지하게 됐죠. 우리 사회가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가치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변화가 우리 사회의 대립, 갈등, 소통의 단절을 낳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좀 생소한 말일지 모르지만 인문주의자를 영어로 휴머니스트라고 합니다. 휴머니스트가 없는 사회. 참 삭막한 사회지요.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회를 흔히 인문학의 본고장이라고 합니다. 아테네는 플라톤이 주장한 것과 같은 필로소퍼 킹(Philosopher King), 즉 철인 군주를 갖지는 못 했죠. 하지만 필로소퍼 시티(Philosopher City), 즉 철인 도시를 세우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이런 배경에서 피어난 것이지요.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려면 대립과 갈등을 넘어 소통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소통이 가능하려면 전제가 있어야 하죠. 그게 바로 인문학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지(知), 즉 안다는 게 무엇이냐?"라고요. 그랬더니 제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인(知人), 즉 사람을 아는 것이다"라고요. 요컨대 앎이란 바로 사람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인문학적 가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참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또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애완견에 대해, 또 어떤 친구들은 주식이나 아파트에 대해 전문가가 따로 없을 정도로 잘 알 고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정보와 지식이 정작 사람에 대해 이해하는 데는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 대해 이해하는 데도 마찬가지이고요. 빌딩과 다리가 아닌 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 그린 서울의 얼굴 제 경험 하나를 이야기할 게요. 제가 교도소에 참 오래 있었잖아요. 제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는 한강에 제2한강교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지하철도 뚫리고, 63빌딩도 세워지고, 제3한강교도 놓였지요. '제3한강교'라는 노래도 제가 수감생활을 하던 시절에 나왔어요. 그 시절에는 감방에 신입이 들어오면 감옥에 와 있는 사이 변한 서울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게 중요한 일과였어요. 끊임없이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풍경이 시시각각 바뀌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같은 방에 있던 젊은 친구 하나는 새로 들어온 사람이 서울의 발전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꼭 핀잔을 주곤 했어요. 서울에 새로 생긴 건물에 대해 설명하면서 "얼마나 높은지 아냐"라고 말하면 "임마 그게 네 거냐. 쳐다보면 고개만 아프지"라고 대꾸하는 식이지요. 그 젊은 친구는 서울역에서 13살 먹은 누이동생을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그 동생을 10년 뒤에 만났어요. 어디에서냐 하면 서울의 어느 사창가에서요. 처음에는 이 친구가 동생을 못 알아 봤대요. 그런데 동생이 먼저 오빠를 발견하고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그제서야 쫒아갔지만 결국 동생을 놓치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서울을 증오해요. 서울은 그에게 순진한 13살 소녀를 창녀로 만든 곳이었던 것이지요. 그 친구에게 만약 '서울의 얼굴'을 그려보라고 하면 과연 어떤 모습을 그릴까요. 순진한 옛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낯선 창녀의 모습이 아닐까요. 개인적 비극 때문에 너무 감정적으로 표현한 것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서울에 대한 그 친구의 생각이 매우 인문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회에 대해 빌딩의 높이나 교량의 숫자로 판단하는 이들과 달리 그 사회의 오갈 데 없는 한 소녀가 10년 뒤 어떻게 성장했느냐는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했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인문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문학적 사고가 설 자리가 없는 곳에서는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화폐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있는 가치입니다. 화폐 가치가 전면화되면 인간의 정체성도 사라져 제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의 두 번째 주제는 "화폐 가치의 전면화"입니다. 상품사회에서는 인간의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인문학적 사고가 설 자리를 잃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이야기지요. 그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가치가 단 하나의 가치, 즉 화폐 가치로 단일화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쌀 한 가마가 구두 한 켤레와 같다." 이건 말이 안 되죠. 왜냐고요? 당연하지요. 밥을 짓는 쌀과 발에 신는 구두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상품이 되면 달라집니다. 쌀이 상품이 되는 경우, 그냥 밥을 지어 먹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파는 상품이 됩니다. 그런데 시장에 팔기 위해서는 자신을 가치 형태로 표현해야 합니다. 즉 자신의 등가물이 무엇이냐를 따지게 되는 것이지요. 자신을 구두라는 등가물, 즉 가치가 같은 물건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쌀은 쌀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집니다. 쌀이 구두로서 표현되면 말이 안 되잖아요. 구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시장에 나오는 순간 쌀은 밥과 관계없고, 구두는 발과 관계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상품의 가치표현 형식입니다. 만약 여기에 있는 사람 한 명이 구두 한 켤레와 가치가 같다고 하면 그 사람은 굉장히 기분 나쁘겠지요. 그런데 만약 구두 한 켤레가 아니고 연봉 1억의 가치가 있다고 하면 대개는 기분 나빠하지 않겠지요. 이게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요. 사람 역시 시장에서 교환되는 상품이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의 등가물이 무엇인지를 판가름하는 가치가 화폐 단위로 환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는 순간 화폐단위로 가늠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은 사라지는 것이지요. 또 사람을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예는 어떻습니까. 남편이 아주 뛰어난 변호사인데 그 부인은 매우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반응들이 나와요. "아 부인의 친정이 잘 사나보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 천박해졌을까요. 모든 노동에 대해 "얼마짜리"인지 묻는 사회 ▲ 신영복 교수.ⓒ프레시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으로 됩니다. '출산'을 예로 들어봅시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일. 이게 과연 상품이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사람이 세상에 처음 나오는 '출산' 행위를 상품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산모는 '환자'로 규정되어 산부인과 병원에 보내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사의 손을 거쳐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거래됩니다. 노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우리 사회는 어느새 노인을 '환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노인은 오랜 경륜을 갖고 삶을 마무리하는 존재가 아니라 각종 서비스 상품의 소비자가 돼 버립니다. 얼마 전에 앨빈 토플러가 새 책을 냈습니다. 거기서 '프로슈머'라는 개념을 제시했지요.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다 인상적인 대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비(非)시장적 영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사실 시장은 비시장적인 부분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앞서 '출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병원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는데요. 병원에서 병을 치료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꼭 그런 게 아니지요. 의사에게 처방을 받는 것만으로 병이 낫는 것은 아니니까요. 시장 외부의 노력, 그러니까 약을 잘 챙겨 먹는 것부터 주위 사람들의 배려와 치료를 위한 자신의 의지가 병을 낫게 하는 데에 70~80%의 역할을 차지하지요. 그런데 시장 중심의 사회는 이런 영역을 무시합니다. 토플러의 책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2002년 한해 동안 미국의 현금 지급기에서 입출금한 횟수가 120억 번이라고 합니다. 한번에 2분씩 걸린다고 치면 280억 분의 시간이 소요된 셈이죠. 미국인들이 총 280억 분의 노동을 자발적으로 수행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동은 시장의 바깥에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노동이 없었다면 현급 지급기를 통해 작동하는 시장은 굴러가지 않았겠지요. 결국 시장이 작동하기 위해서도 시장 바깥의 영역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시장 바깥에 있는 노동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지요. 이런 사회에서는 화폐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지식이나 기술, 노동은 가치가 없는 게 돼 버립니다. 이렇게 모든 게 화폐 가치로만 환산돼 통용되는 사회에서는 질은 사라지고 양만 남습니다. "이게 얼마짜리냐"라는 기준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하지만 우리들 자신, 그리고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많은 것들은 대개 이렇게 "얼마 짜리"라는 기준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애정', '우정' 이런 것들을 어떻게 화폐 단위의 시장적 가치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사고 팔수 없는 것들, 시장적 가치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은 어느새 주변으로 밀려나버리곤 합니다. 계량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가치만이 존중받고, 그 외의 것들은 도무지 배려받지 못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대립과 갈등은 상당 부분 이런 현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경영학과에 다니다 경제학과로 전과한 분이 있습니다. 왜 전과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경영학 수업 첫 시간에 '부채도 자산'이라는 말을 하더라. 그런 말을 들으니 '아니 이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 뒀다"는 대답이 돌아오더라고요. 저는 경제학과를 나왔는데 제 경우에는 경제학 수업 첫 시간에 들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게 경제학의 원칙이다"라는 말이 두고두고 고민을 안겨 줬습니다. 그것도 꼭 도둑놈 심보 같았거든요. 남들 보다 일은 덜 하고 더 많이 챙기겠다는 것이잖아요. (웃음) 그런데 웃을 일이 아니라 정말이지 이런 생각이 일반화되면 사회가 굉장히 천박해집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회적 존재가 위협을 받기도 하고요. 상품 생산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인간 자체가 부정돼 버리거든요. 실업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상품을 만들지 못 하거나 상품으로 거래될 수 없는 사람은 사람 취급 못 받는 사회. 이런 사회는 결코 인간적인 곳이 아니지요. ▲ ⓒ프레시안 '도로의 논리'와 '길의 철학' 제가 지금 이야기한 것들은 어쩌면 "대립과 갈등의 시대, 진정한 소통을 위하여"라는 오늘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화와 정서처럼 화폐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의 중요성을 꼭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크게 보면 그런 것들이 진정한 소통을 위한 바탕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것들은 화폐 가치로 환산될 수 있는 것들만이 목표가 된 사회, 혹은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도 좋다는 사회에서는 종종 외면되었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세 번째 주제는 목표와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부릅니다. 또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고 합니다. 그리고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목표의 달성으로 모든 수단이 합리화되는 사회에서는 '게임의 룰'이 사라집니다. 그런 게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옛날 시골에서는 누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가 다 드러났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수단을 통해서건 '돈 벌이'라는 목표만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은 통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도시에서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 하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결과만 놓고 이야기하는 곳이거든요. 얼마나 빨리 목표에 다가가느냐, 즉 속도와 효율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든 목표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 즉 속도와 효율만을 중시하는 논리를 '도로의 논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는 철학을 '길의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도로의 논리'에 의해 빚어졌습니다. 이제 그것을 대체하는 '길의 철학'이 필요한 때가 됐습니다. '도로의 논리'의 대표적인 사례가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쿠테타를 해서라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니. 말도 안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이런 이상한 논리를 오랫동안 받아들여 왔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 기득권 집단의 논리이기도 했지요. 어떤 방법으로건 기득권을 손에 넣기만 하면 모든 게 정당화된다는 것이죠. 일단 이기고 보자는 '도로의 논리' 속에서 소통은 요원해져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사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었거든요. 그런데 장난도 많이 쳐서 선생님께 벌을 참 많이 섰어요. 지금도 초등학교 가서 보니까 복도가 제일 먼저 눈에 띄더라고요. 거기서 의자를 들고 벌을 섰던 기억이 생생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의자를 들고 벌을 서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게 우리 사회를 아주 전형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의자를 만들 때는 그것을 깔고 앉기 위해 만든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위에 앉아야 할 것을 오히려 머리 위에 들고 있어요. 아주 거꾸로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다 합의해서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아요. "일단 성장하고 나중에 분배하면 되지 않느냐." "과정이 비합리적이더라도 좀 참자. 그래서 나중에 분배해 주면 될 것 아니냐." 이런 주장이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어요.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라도 일단 이기고 보자는 논리. 이런 논리가 판을 치면 대립과 갈등을 넘어선 진정한 소통은 아주 요원한 이야기가 되지요. 제가 초등학교 때 아주 친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자꾸 괴롭힘을 당했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괴롭힘 당하던 친구를 계속 격려해서 괴롭히는 친구와 한판 싸우기로 했어요. 저와 괴롭힘 당하던 친구가 한편이 되고 괴롭히던 친구와 또 다른 친구가 다른 편이 돼서 방과 후에 학교 뒤편에 있는 강가에 가서 대판 치고 받고 싸웠어요. 하지만 저와 제 친구의 코피가 먼저 터지는 바람에 졌지요. 이긴 친구들은 의기양양하게 집에 돌아갔고요. 정말 괘씸하더라고요. 그때 강가에 앉아 코피를 씻으며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나쁜 놈이 이기는 경우도 있구나." 30년 뒤 감옥에 있을 때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이기는 게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구나. 한 쪽에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쪽에 어린 시절 강가에서 코피를 씻던 나처럼 좌절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지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도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 하는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은 매사를 '도로의 논리'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도로는 고속도로가 좋은 것이지요. 또 짧을수록 좋습니다. 최대한 목표에 빨리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소통을 배제하는 근대성, 이제 반성할 때 하지만 '길의 철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길 위를 걷는 것 자체가 삶이거든요. 우리 삶을 무시하면서 목적을 이루려 한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봅니다. 삶을 희생하여 추구하는 목적이란 정말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진정한 목적과 수단의 순서가 뒤바뀐 것이겠지요. 마치 사람이 깔고 앉기 위해 만든 의자를 머리 위에 들고 있는 모습처럼요. 도로의 논리. 그러니까 과정은 무시한 채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는 논리. 그것은 자본의 논리에 다름 아닙니다. 자본은 회전 속도가 빠를수록 더 많은 이윤을 얻습니다. 또 자본은 그 속성상 적게 투자해서 많이 벌어 들이는 것, 즉 높은 효율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자본의 논리가 내면화 되면서 우리는 속도, 효율에 대해 거의 광신적으로 몰두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바로 근대 사회의 속성이자 구성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근대라는 게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것이니까요. 결국 속도와 효율만을 숭상하는 도로의 논리를 넘어서 과정 그 자체를 존중하는 '길의 철학'을 사회화하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네 번째 주제는 '근대성에 대한 반성'입니다. 근대 사회는 자본의 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쉬지 않고 증식을 거듭해야 하는 자본의 원리는 속도와 효율의 논리를 사회화한 것이거든요. 이런 문제에 대해 길게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만, "자본주의 사회가 정말 진보된 사회다" 혹은 "사회의 근대화는 진보의 과정이었다"라는 이야기는 이제 다시 검토해야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59학번입니다. 저희 세대는 '근대화'라는 것에 대해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한 세대였습니다. 아마 요즘 젊은 학생들은 하지 않는 고민일 것입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때 4.19를 겪었습니다. 3학년 때 5ㆍ16을 겪었지요. 당시는 1960년대 초였는데, 우리 것을 완벽히 버리고 미국과 유럽의 것을 경쟁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시대적 분위기였습니다. 그것을 근대화라고 여겼고, 이런 근대 기획이 국정의 기본 철학으로 자리를 잡았지요. 물론 이런 근대 기획은 일제 식민지 때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근대 기획에 대해 이제 반성할 때가 됐습니다. 앞서 인문학의 위기가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사실 이런 것들이 바로 근대의 결과물입니다. 근대화는 우리 현대사의 국가적 기획이었으며 당연히 근대성의 존재론 논리가 대화와 소통의 문화를 배제해 왔습니다.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의 전환이 진정한 소통의 전제조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는 관계론 원리를 기조로 하는 인문학적이고 공동체적인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이 오늘 이야기의 다섯 번째 주제입니다. 근대가 어떤 역사였는지,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등을 살펴보면 근대사의 핵심 내용에 대해 알게 됩니다. 강자가 계속 자신을 키워 온 소위 '강철의 철학'이지요. 그것을 제 논리 체계에서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강화하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는 것이지요. 개인이건 집단이건, 국가건 자기 존재를 강화하고 키워내려는 욕구가 근대성의 핵심 원리로 작동해 왔습니다. 거울에 비친 시대, 사람에 비친 시대 하지만 이런 존재론적 패러다임은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이런 패러다임이 근거하고 있는 패권적 질서는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프레시안〉에 연재한 글을 모아서 <강의>라는 책을 냈는데요. 그 책에서 묵자의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묵자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수많은 나라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며 서로를 계속 흡수 합병하여 덩치를 키워가던 시대입니다. 주나라 말기 수많은 나라로 갈라졌던 중국은 춘추시대를 거치며 12개의 나라로 줄어들고, 다시 전국시대에는 7개로 줄어든 뒤 결국 진나라 하나로 통일됩니다. 한 국가의 패권으로 정리가 된 셈이지요. 지금과 닮았습니다. 지금도 거의 모든 국가들이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지향이었던 '부국강병'을 목표로 삼고 사활적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국가의 패권으로 귀결되고 있고요. 진나라의 패권으로 끝난 춘추전국 시대의 치열한 경쟁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혹자는 이런 경쟁을 통해 국가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춘추전국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묵자는 그런 이들의 주장을 "만 명에게 약을 썼는데 서너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죽어버린 것"에 비유합니다. 이런 약을 결코 좋은 약이라 부를 수 없겠지요. '부국강병'을 목표로 한 치열한 경쟁은 소수의 국가, 결국은 한 개의 국가만 승리자로 남기고 모두를 몰락시켰습니다. 우리는 소수의 승전국에 주목할 게 아니라 다수의 패전국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소수의 승전국마저도 종국에는 패망하고 말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시대상을 지켜본 묵자는 "불경어수(不鏡於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거울이 없어서 맑은 물을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로 삼았던 시절입니다. 결국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요. 묵자는 이어서 "경어인(鏡於人)"이라는 말을 남깁니다. 물이 아니라 사람에 비추어 보라는 것이지요.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전쟁을 일삼는 패권적 질서의 외양은 잠시 화려해 보일 수 있습니다. 거울(물)에 비춰보면 이런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나타나겠지요. 하지만 거울(물)이 아닌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 비춰보면 다른 모습이 나타나겠지요. 전쟁 승리의 혜택을 보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피해를 입은 이들은 압도적으로 많을 테니까요. 아마도 사람에 비추어본다면 전쟁의 그늘에서 피폐해진 삶이 드러날 것입니다. 묵자의 말은 부국강병의 화려한 면모가 아닌, 그것을 지탱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그 시대를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묵자는 거울에 비친 화려한 모습이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힘을 과시하며 약소국을 계속 병탄해 가던 국가가 결국 약소국의 연합전선에 부딪혀 무너지는 것을 계속 지켜봤기 때문이지요. 묵자의불경어수不鏡於水라는말은훗날유학자들에의해무감어수無鑑於水)"등처럼개인윤리를강조하는개념으로바뀌어갑니다하지만춘추전국시대의혼란속에서거울에비친모습대신사람들의삶에서드러난모습을통

해시대를파악하라는가르침은지금까지도큰울림을남깁니다
우리가히말라야산에사는토끼를닮지않았는지
산업자본주의는어쨋거나가치를창출하기는합니다물건을끊임없이만들어내지요비록그과정에투입된노동력과
자연에대해제대로갚아주지는않지만말입니다하지만현대의금융자본주의는가치창출과는아예관계가없습니다
그저끊임없이큰자본이작은자본을흡수하는과정일뿐입니다따라서결코지속가능한것이될수없습니다마치춘
추전국시대와마찬가지로요
패권적으로쌓아올린부와영광다른사람들의희생위에쌓아올린공적에대해서는이제보다냉정하게평가하고반
성해야합니다
프랑스의철학자알튀세르가한말중에히말라야산에사는토끼가주의해야할점이라는게있습니다히말라야산
에사는토끼가평지에사는코끼리보다크다는착각을하지말라는뜻입니다아마도그쪽문화권에히말라야산에사
는토끼를지칭하는히말라야래빗이라는표현이있나봅니다
우리가혹시이런히말라야래빗을닮고자하는것은아닌지되물어볼필요가있습니다다른사람들의희생을딛고높
은곳에서있는이가정말그아래에있는이들보다자신이더크다고여기고있은것은아닌지말입니다
그리고이런반성을통해사람들은겸손해집니다또이렇게겸손해지면존재론적패러다임속에서자기것을무턱대고
끝까지추구하는무식함도사라지기마련입니다이속에서서로서로가소통할수있는가능성이열리는것이죠
하지만근대사회는우리가계속히말라야산에사는토끼를닮아가도록추동합니다심지어자녀를교육할때조차우
리는경쟁력을강조합니다남보다더강한존재로크기만을바라는것이지요이런사회에서소통은이뤄지기어렵습
니다저는이런상황이소통의가장큰장애라고생각합니다
네이름이뭐냐…우리문화의관계론적전통

그런데우리사회에는이런것과달리굉장히아름답고인간적인문화가많이있습니다관계론적원리에따른인문학
적이면서공동체적인전통때문입니다오늘이야기의다섯번째주제가이런것입니다먼저제감옥살이경험을이야
기해보겠습니다
대전교도소에서같은사건으로한30명정도가징역살이를했습니다저는대법원까지올라갔다가파기환송되고다
시재판받느라좀늦게대전교도소로이소했습니다그랬더니누가조금일찍왔더라면고암이응노선생님을만날뻔
했는데…하고말하는거예요
그래서아쉬운마음에이선생님과함께지냈던분을찾았습니다한젊은친구가감방에서함께지냈더군요그친구에
게이선생님에대해물었더니괴팍한노인네라는대답이튀어나왔습니다왜냐자꾸이름을물어본다는것입니다
쪽팔리게말이죠교도소에서는이름을잘안부르거든요수번으로불러요저도제일잊어버리지않는숫자가교도소
수번이거든요
그런데이응노선생님은만나는사람마다이름이뭐냐고묻고다닌것입니다사람을가리켜서어떻게번호로부르냐는
것이죠그래서이친구가자기는응일이라고대답했더니아뉘집큰아들이징역들어왔구만그러시더래요자기가
맏아들이맞다더군요그친구는이선생님에게서이런대답을듣고밤새한잠도못잤다고하더군요
이선생님세대의분들은사람을결코따로떨어진개인으로바라보지않습니다여러사람들과의관계를통해들여다
봅니다누구의자식인가누구의형제누구의친구인가라는틀로바라보는것이지요
저는이런관점이아주삭막하기만한근대의존재론적사고와는다른것이라고생각합니다일종의관계론적원리라
할수있지요
조화와균형의예술붓글씨에서관계론적원리를찾다
제자랑같습니다만제가붓글씨를잘쓰는편입니다처음처럼소주도있잖아요웃음그외에도제가붓글씨써서크
게걸어놓은게제법많습니다한문도잘쓰고요그런데요붓글씨즉서도라는것은서양에는없는예술장르예요제
가서도의관계론에관한책도쓴적이있는데요서도는동양의관계론적원리가아주잘녹아있는장르입니다
붓글씨를쓸때는처음에쓴획의각도가비뚤어졌다고그것을지우고다시쓰지못합니다그다음획을통해결함을교
정해야합니다그것으로안되면다음획으로또안되면다시다음획으로…또글자가틀리면역시다음글자로고쳐
야하죠한행의잘못은그다음행으로보완하고요이런식으로고쳐가면서쓰다보면글씨를쓰는내내굉장히여러
곳을동시에봐야합니다그래서붓글씨를쓸때는굉장히긴장해야합니다한획을그을때마다전체를동시에봐야하
거든요

그리고붓글씨쓸때제일중요한게흑과백의조화입니다굉장히큰종이에조그만글씨를쓰면안되죠조화가안되
니까요저정도의수준이되면붓글씨쓸때까만건안봅니다하얀게어디에얼마나남았나를봅니다디자인전공하
는분들이제가붓글씨쓰는것을보더니선생님은네거티브스페이스만보시는군요라고하더라고요물론까만것과
하얀것만으로붓글씨작품이완성되는것은아니지요전체적으로하나의글씨가완성되면빨간낙관도들어가고정서
도들어가서최종적인균형을이룹니다
이런하나하나가모여팽팽한균형을이루는것이지요이것이동양미학의절정이라고하는서도의미학입니다글자
한자획하나잘쓴다고좋은글씨로평가하지않습니다누가그런글씨를가져오길래저는서구시민적질서는잘잡
혀있구만이라고만대답했습니다웃음
서도는관계론의예술인데그것은어떤배타적이고개별적인존재란없다는생각에바탕한것입니다모든것은서로
영향을주고받으며다공유되기마련입니다그런데그것을무시하고단절된존재로인식하는순간우리사회는지극히
기계적인곳이돼버립니다
면벽명상으로건진기억…왜1월1일을특별하게여기나요
또징역살이이야기를할게요제가징역살이를20년정도했
는데그중독방에있었던기간을다합치니5년정도되더군요
그5년동안제일열심히한것이명상면벽명상입니다처음
에는아주열심히했습니다오늘의주제도소통인데그렇게
면벽명상을열심히하다보면뭔가소통된다는것이에요우주
의정보진리체계와통한다는것아닙니까갇혀있는이들에게
는그런이야기가얼마나솔깃한지모릅니다단전호흡하면서
아주열심히해봤는데절대로소통이안되더군요
그래서제가명상의방법을바꿨습니다제가아주어렸을때부터만났던사람들을모두하나씩떠올려보는것입니다
그리고그들과함께했던기억들까지다시떠올려보는것이죠단지기억만떠올리는게아닙니다당시의경험을추체
험하면서나이든상태에서다시경험해보는것입니다그렇게제가과거에겪었던일을감옥에서다시겪어보면굉장
히많은것들을새로발견하게됩니다기억을더듬다보니제가4살때부터기억이나더군요
또굉장히저와가깝고함께오래지냈지만제게별영향을주지못한사람도있고반대로잠깐만나고말았지만제게큰
영향을미친사람도있습니다
중학교1학년때였어요학교에서1월1일에학생들을소집했습니다신년식을한다는것이죠당시에는학교에서그런
행사를하곤했어요

신년식을마친뒤선생님께서신년을맞이하는각오에대해돌아가면서한마디씩하라고하시더라고요다들뻔한이야
기를했지요저도심부름잘하고숙제잘하겠다는이야기를했어요
그런데순서가중간쯤가니까한친구가독특한이야기를했어요그친구는공부도못하고집도가난해서별로주목받
지도못하고학교에서거의두각을나타내지못하는편이었어요
그런데그친구가일어서더니자기는시간은원래강물처럼흘러가는것인데굳이1월1일이라고특별하게여기는선생
님을이해할수없다고말하는거예요그때교실이조용해졌어요저역시굉장한충격을받았고요물론속으로이런생
각도했죠 내가저런이야기를할걸 웃음
만약제게조금이나마사색하는습관이있었다면그것은아마도중학교에입학하던해신년식에서들었던강물이야기
때문이아닐까하는생각을지금도하곤합니다
5년동안독방에서지내며면벽명상을한끝에제가내린결론은이렇습니다나란뭐냐결론은내가만난모든사람들
내속에들어와있는모든사람들내가겪은모든사건들이모두가나를구성한다는것입니다그사람들과내가살았
던사회우리시대의파란만장한사건들과아무런상관없는나의고유한배타적인정체성은있을수없다는것이지요
오히려가장훌륭한사람은자신을살고있는시대를삶속에가장깊숙이끌어들인사람이아닐까하는생각도듭니다
그래서저는우리사회가오랫동안진행해온근대기획의결론으로내면화된존재론적문화존재론적사회구조를근
본적으로반성해야한다는생각에이르게됐습니다
자신이겪은것이유일하다고믿는데서또자신의존재성을강화하려는데서모든대립과갈등이비롯된다는것입니
다우리사회에서소통의여지가사라진것도같은맥락에서비롯된것이겠지요물론존재론적문화에기반한사회구
조를바꾸는게중요하겠지만우리의일상적인삶의자세를반성하는게먼저라고봅니다
우직한이의세상보는법배워야…머리에서가슴으로향하는여행
제가오늘하려는이야기의여섯번째주��는2개의가장먼여행입니다우리는우리가선택하지않은사회에태어나
서학습과포섭에의하여기존의문화와의식을받아들이게됩니다그러나사회의발전은기존의사회의식에대한우
직한독법을키우는데서시작됩니다
모든사람들이기존의문화즉근대성과자본의원리존재론적인원리에던져져서세상의기존질서를부지런히배우
기만한다면사회의변화발전의여지는없을것입니다세상에는두종류의사람이있습니다지혜로운사람과어리석
은사람이그것입니다지혜로운사람은세상에자신을잘맞추는사람입니다어리석은사람은반대로사회를자신에
게맞출수없을까고민하는사람입니다그런데세상에모두지혜로운사람들만있다면그래서누구나사회에자신을
발빠르게맞춰가기만한다면사회가변화할계기는없을것입니다
그런데좀우직한사람좀어리석은사람들이사회를지금보다인간적인곳으로바꿀수없을까하면서노력하는가운
데사회는조금씩바뀌어왔습니다
기존의사회의식이얼마나편견에치우친것인지사회를지배하는이데올로기에어떤특정한집단의이해관계가깃든
것인지를깨닫기위해서는주체적인인식능력이필수적입니다그런데이��능력은지혜로운이들이아닌어리석고우
직한이들에게생겨납니다세상에너무쉽게적응하는이들에게이런능력은필요없는것이니까요
우직한이들이세상을보는법기존의사회의식에대한우직한독법은원래언론의몫입니다언론의역할은단지사실
을전달하는데그치는게아닙니다언론의바른역할은이런우직한독법으로세상을읽어내는것입니다
이런독법으로세상을읽어내면서자신을완성해가려면무엇을해야할까요저는그것을2개의먼여행이라고부르
고싶습니다머리에서가슴으로의여행그리고가슴에서다시발에이르는여행입니다첫번째여행은프럼헤드투하
트Fromheadtoheart즉자신의우직한독법으로깨우친주체적인식을머리에서가슴으로옮겨가는과정입니다
자신이아는것을인간적인애정과결합시켜가는과정이지요아마도세상에서가장먼여행이아닐까싶습니다
좋은사람은많이아는사람이아니라마음이여린사람입니다제가실토할게있습니다몇몇친구들에게좀미안한이
야기일수있는데요
1960년대학생운동을하던시절을돌이켜보면굉장히능력있고진보적인친구들이참많았습니다제가그들과헤어
져감옥에있는동안내내그친구들이어떻���지내고있을지참궁금했습니다그래서출소한직후에제일먼저물어본
게그친구들의근황이었습니다
그런데그친구들중자리를지키고있는경우가하나도없더군요다들출세했더군요그대신남아있는사람들은예전
에별능력없어보였던친구들사명감이아니라친구들에대한미안함때문에참여했던이들그런사람들이남아있더
라고요
제게는놀라운발견이었습니다20년동안징역을살아놓고도사람에대해이렇게모르다니하는생각이들었어요
사람을예술품으로빚어내는사회…가슴에서발로향하는여행
또하나의먼여행은가슴에서부터발까지도달하는것입니다발에도달한다는것은개인차원에서의인성고양뿐아
니라동시대의가장많은이들이고뇌하는현장에서는것을가리킵니다가슴이나무라면발이숲을이루는것입니다
사회는한인간이머리에서가슴가슴에서발로이르는여행을해나갈수있도록사람을키워야합니다
제일좋은사회는도자기를굽는가마처럼그속의사람들을아름다운예술품으로훈도해주는사회가아닐까싶습니다
편달은어떤사람을걸어가게하고그라인에서일탈하면그것을채찍질해서바로서게하는것입니다하지만훈도는
큰���마에집어넣고따뜻하게구워낸다는뜻입니다편달과는근본적으로다른개념이지요
이런훈도는그냥되는게아닙니다사회적문화가성숙해야가능한것입니다그런데이런문화를누가만들까요인문
학적가치도소멸되고그자리에화폐가치라는계량적가치가들어서있는데과연누가할수있을까요참으로어렵습
니다하지만누군가는해야합니다그리고이런역할은사회가신뢰할수있는집단만이할수있습니다이런신뢰집단
이없는사회는매우불행한곳이지요
언론이신뢰집단이될수있으려면
제가오늘하려는이야기의일곱번째주제는이런신뢰집단과언론에관한것입니다사회속에서신뢰집단의역할을
해야할곳이바로언론입니다언론은진실과비판을본령으로합니다진실은사실의창조적구성이며이런창조는당
대사회의과제를중심에둔비판적기능에의해이루어집니다비판은기존의지배이데올로기를비판하는우직한실
천이어야합니다
그리고언론기관이먼저민주주의에대한신뢰에충실해야사회일반의신뢰를받는신뢰집단이될수있습니다신뢰
집단은소통의중심이며이항대립의극단적갈등을지양하는주체입니다그뿐만아니라신뢰는사회성의핵심��며그
자체가가치입니다고난을견디게하는것은희망이고희망은신뢰에서나옵니다
최근언론을둘러싼환경은크게변하고있습니다앨빈토플러가이야기한프로슈머의개념이언론에대해서도적용되
고있는것이지요언론의생산자와소비자가나뉘어있는구도속에서언론권력이자신들이조직한이데올로기를일방
적으로전달하던시대가지나가고있는것이지요
〈프레시안〉기사에달린수많은댓글처럼독자들은더이상소비자에머무르지않습니다그들은프로슈머즉생산
자이자소비자인존재가돼가고있습니다이들과언론의쌍방향소통속에서사람들이어떻게성장할수있을지새로
운사회문화를어떻게키워갈수있을지를고민해야하는과제가제시되고있습니다이런과제를해결하는것은〈프
레시안〉을포함한언론의숙제가될것입니다
앞서언론의본령이라고이야기한진실과비판은동전의양면과도같습니다단순한사실은작은그릇에비유할수있
습니다바닷물을그릇으로뜨면그그릇에담긴것이바닷물인건사실이지만그것이바다라는진실을이야기하지는
못합니다언론이객관적인사실을얘기한다고요그것은거짓말이지요어떤사실을헤드라인으로삼느냐에따라얼
마든지수용자에게관여할수있습니다사상은선택입니다수많은사상중어느것을선택해그선택된사실이어떤발
언을하게끔만드는것이지금까지언론권력이해온역할이었습니다
언론은사실을제시하는것을넘어사실을진실로창조하는노력을해야합니다진실이도대체무엇인지에대해캐물
어야합니다사회를우직하게읽고그래서조금씩바꿔내는비판적기능을가지고사실을새롭게선택하고구성하고
조직하여진실을창조해내는노력을해야합니다그과정을통해사람들에게신뢰를받아야합니다
여럿이함께모인지혜의힘
언론의역할에대해시사점을주는사례로프란시스골튼이라는통계학자이자유전학자가겪은일화를소개하고싶습
니다
이분이어느날시골장터에갔습니다그랬더니황소한마리를무대에올려놓고그소의몸무게를맞추는퀴즈가열리
고있었습니다돈을얼마씩낸뒤각자소의몸무게를종이에적어통에넣고제일가깝게맞춘사람이각자가낸돈을
모두가져가는것입니다
프란시스골튼이지켜보던날은800명이이행사에참가했습니다그는사람들이소의몸무게를얼마나맞출수있을까
에대해궁금해했습니다아마아무도못맞출것이라고생각했지요통을열어확인해보니정말맞춘사람이없었습니
그걸조사해보니13명은무엇을적었는지판독이불가능했습니다그걸빼면787장이남는데거기에적힌숫자들을다
더해서다시787로나눴더니1197파운드라는숫자가나왔습니다그런데소의몸무게가얼마였는지아세요1198파운
드였습니다
어쩌면소의몸무게가1197파운드였는지도모르지요저울이틀렸을수도있으니까요그것을보고프란시스골튼은크
게뉘우쳤습니다단한사람도맞추지못했지만여러사람의판단이모이니까정확한몸무게를맞출수있었던것이죠
언론도얼핏보기에어리석어보이는대중의지혜를모아내는법을배워야합니다요즘처럼쌍방향소통이발달한인
터넷시대에는더욱그렇지요
제가감옥에서나와서붓글씨로처음쓴내용이여럿이함께였습니다다들참좋다고하더라고요당시에는한글액
자가별로없던시절이었거든요
그런데제가잘아는후배교수한사람이여기에대해문제를제기했어요 여럿이함께라는말에는방법만있고목표
가없다는것이지요 여럿이함께어디로가자는거냐그건방법이지목표가없지않느냐라는것입니다
그래서그다음��터는제가글씨아래에방서를쓰기시작했습니다 여럿이함께가면길은뒤에생겨난다라고요여
럿이함께가야할목표는이렇게생겨난길위에있다는말을하고싶었습니다
목표는길위에서찾아야합니다 누가누구를이끌고나가겠다는오만한생각은큰잘못입니다특히언론은이런생
각을경계해야합니다대중은잘알아요아무리강조하고크게활자를뽑아서다른곳으로눈을돌려도그소의몸무게
가1197파운드인줄다알고있습니다이때대중에게소의몸무게가1197파운드라고솔직하게이야기해야언론은비
로소신뢰받는집단이될수있습니다
아래로손내미는연대…사회통합은강물처럼
지금우리사회에신뢰받는집단이있습니까대학대학교수전혀신뢰받지못합니다문제가있는곳이면어디안끼
는곳이없어요최근바다이야기사태에는끼어들지않았나모르겠습니다정치권종교계법조계다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신뢰집단이없는사회는이항대립만남아있는사회가됩니다 가위와바위만있는가위바위보가됩니다보
하나가있느냐없느냐는엄청난차이를낳기마련이지요
지금우리사회에서신뢰집단이되려고하는이들이보이는모습이어떤것이지요상대방을흠집내���자신이신뢰받
으려합니다이과정에서우리사회는엄청난내부소모를겪고있습니다
이런소모적인상황을극복하고인간이사회속에튼튼히뿌리내릴수있도록하는역할을언론이담당해주길바랍니
다이런역할이제대로이뤄질때진정한사회통합도가능해지겠지요제가오늘하려는이야기의여덟번째주제는사
회통합에관한것입니다우리의삶은사람과의관계로이루어져있습니다우리가느끼는가장절실한아픔과기쁨은
모두사람에게서옵니다그런데세상에는관대한사람과오만한사람이라는두종류의사람이있습니다
관대한사람은자신보다약한사람에게관대한사람입니다오만한사람들을자신보다약한사람에게오만한사람입니
다하지만이런이들은자신보다강한이들에게는결코오만하지않습니다결국어떤사람이관대한사람인지오만한
사람인지를알려면그사람보다약한이들낮은곳에있는이들에게어떻게대하는지를보면됩니다어떤사람에대해
알고싶으면그보다낮은곳에있는사람에게물어보면알수있습니다
그래서가장낮은곳에있는사람이야말로세상을가장잘들여다보는사람일수밖에없습니다그렇다면우리가지금
고민하고있는사회통합��가장낮은곳에있는이들의자리에설때답을얻을수있습니다가장낮은곳으로향하기
위해우리는강물을닮아야합니다사회통합은강물처럼하라는말을하고싶습니다물은항상아래로낮은곳으로흐
릅니다그래서바다가됩니다가장큰물가장낮은물그것이바다입니다
가장낮은곳에서모든것을다받아들이니까이름이바다가된것입니다이렇게아래로손을내미는연대를하방연대
라고부릅니다한사회의역량은내부소모를줄이고통합의외연을확대함으로써성장하게되는것입니다그리고사
회의통합은낮은곳약한자와연대해나가는하방연대를통해이루어져야합니다
반면이처럼아래를향하지않는연대나통합은매우위험합니다자신들보다강한세력이어떻게생각할까하는불안
에바탕한연대는자칫자신들보다약한세력에대해서는매우오만한모습을취할수있습니다그래서위험합니다아
래가아닌위를향하는통합과연대는추종이나야합에불과한경우가대부분입니다
성찰의힘에서비롯된당당한자부심
오늘하고자했던이야기의마지막주제는성찰과양심그리고주체성에관한것입니다우리가언론매체를대할때
그냥한번보고버리는경우가많습니다또언론은사회의빠른변화를쫒아가며표면의출렁거림만을따라가는경우
가많습니다
하지만앞서이야기했던것처럼언론의역할은사실보도가아니라진실의창조입니다그리고사실보도를넘어서
진실을창조하기위해서는사회전체의문화를반성적이고성찰적인것으로만들어가야합니다성찰에대해이야기하
고싶습니다
역사상대표적인성찰론자를꼽으라면장자를들수있습니다장자가이런이야기를했어요 개구리와는바다에대해
이야기할수없다 메뚜기와는얼음에대해이야기할수없다개구리는우물안에갇혀있기때문이고메뚜기는한철
밖에살지못하기때문이지요하지만성찰은바다와얼음을포괄하는것입니다지엽적인한계에갇혀바다와얼음에
대해이야기할수없는개구리나메뚜기의삶을살아서는안된다는것입니다보다큰것을보는태도가필요하다는것
입니다
그리고이런큰시야에바탕한성찰을하려면인문학적소양이필요합니다또양심의중요성에대해눈을떠야합니다
그래야물질적으로조금더잘사는것에연연하지않는인간적인자부심자존심을가질수있습니다그리고이런자부
심과자존심은정말소중한것입니다이런자부심과자존심에관한이야기를끝으로오늘강연을마칠까합니다
또감옥에있던시절의이야기입니다어느날우리방에20대초반의젊은친구가신입으로들어왔습니다그런데교도
소에서주는수의만입고알루미늄식기2개와숟가락만갖고들어온거예요심지어런닝셔츠도입지않았더라고요
그래서참딱해서치약도좀나눠주고런닝셔츠도하나벗어줬거든요그랬더니필요없다면서바로거절하는거예요
표정도어둡고말도안하더라고요그래서다들이상한놈이라고했어요
이튿날세수할때제가다시치약을좀나눠줬거든요그랬더니필요없다니까요라고하면서세탁비누를집어서그걸
로양치질을하는거예요그러니까남보는데서나눠주려던제행동이좀부족한생각에서나온것이었나보다하는생
각이들더라고요
그래서이번에는제가새치약을하나따로사서아무도안볼때몰래줬어요그랬더니다른사람들다듣게큰소리로
필요없다고요라고하는거예요
그랬는데한달후에제게다가오더니선생님치약하나사줄수있어요선생님한테는받아도될것같아요다른사람
에게받으면안그래도좁은잠자리를제가또양보해야하잖아요라고이야기하더군요
그친구는사람이역경속에서살��갈때약간의물질적조건이개선되는게분명히도움이되지만그보다는자기가떳
떳하게자부심과주체성을잃지않는게어려움을견디는데더큰힘이된다는것을잘알고있었던것입니다그젊은
친구는저처럼개념어로정리하지는않았지만이런사실을수많은경험을통해스스로터득한것이지요
자부심을키우고다양성을존중하는사회언론이앞장서야
이런자부심과주체성을키워주고존중해주는사회다양성과인간적가치가존중받는문화는이런사회적토양에서가
능한것입니다그리고이런토양을만들어가는데언론이앞장서야합니다
더구나〈프레시안〉과같은인터넷매체는스스로권력이되어일방적으로주장을전달하기만하는매체가아닌까닭
에이런역할을담당하기에더욱제격이아닌가싶습니다긴이야기들어주셔서감사합니다 <프레시안 - 성현석,여정민 기자>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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