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분야 기반 시설인 프레스 산업은 영원하다!
인천기계산업단지를 기록하다
작성자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5.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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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국일정공 대표
강인덕 (1957년생)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16세에 서울로 상경, 전공을 살려 무역회사 ‘한국정밀기계통상’을 설립하였다. 기계 제작에 없어서는 안 될 프레스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일찌감치 깨달아 1995년에 국일프레스를 인수하여 국일정공을 설립하였다. 기계 공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20년이 넘도록 인천기계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치, 경제, 국방, 경영, 스포츠와 관련된 내용을 절차탁마의 자세로 공부하며 매주 나눔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실향민 2세로 포천에서 태어나 서울에 자리 잡기까지
어린시절 지냈던 포천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지요?

저는 경기도 포천군 포천면 탑동리 856번지에서 태어났어요. 16살까지 포천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서울로 이사를 했어요.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곳의 주소가 세 번이나 바뀌었어요. 처음엔 주소가 포천군이었는데 행정구역 재편으로 양주군으로 바뀐 거예요. 양주군 탑동으로. 그다음 지자체가 출범하면서 동두천이 동두천시로 됐어요. 포천에서 태어나서 양주로 주소가 바뀌었다가 동두천으로 바뀐 거예요. 원래 초등학교는 선단리 지나서 포천으로 다녀야 했는데, 너무 머니까 동두천에 분교를 지어서 거기로 다녔어요. 그래도 행정은 다 포천으로 가서 모든 걸 다 봐야 했죠. 포천 가면 한나절이 지나갔어요. 의정부로 돌아가서 버스 타고 그리로 넘어가서 행정을 보고 그랬던 내용들이어서 불편함이 많았죠. 중학교까지 거기서 다니다가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녔어요. 어린 시절에 떠나와서 그런지 고향엔 그렇게 많이 안 갔죠. 

아버지의 부재가 영향이 컸을 것 같은데 어떠셨는지요?

지난 일들을 판다 카면은 저희는 고향이 이북이에요. 아버님이 황해도고 어머님이 강원도였어요. 옛날엔 강원도도 이북이었습니다. 두 분이 다 이북 분, 이래가지고 남쪽에는 고향이 없죠. 불행하게도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48살에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제가 집안의 장남이고 종손이 되었지요. 더구나 대한민국에 인척이 아무도 없어요. 두 분 다 이북에 두고 와서 인척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죠. 오죽하면은 제가 “삼촌을 어떻게 해야 돼? 삼촌, 큰아버지, 작은아버지라는 촌수는 어떻게 따지는 거지?” 그럴 정도로. 
제 나이 16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 모든 인생이 바뀌었죠. 선수 생활까지 했던 운동도 그만두고, 고생을 많이 했어요.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버려서 ‘나는 절대적으로 월급쟁이가 안 될 것이다.’라는 다짐을 그때 했던 것 같아요. 

월급쟁이가 사업가가 되기까지 
어떤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저는 군대를 제대하고 처음엔 월급쟁이로 들어갔다가 빠른 나이에 독립했어요. 당시에 “망해도 나는 본전!”이라고 제가 그랬어요. 처음에 제가 사업한다고 할 때 집에서 무지하게 반대를 했죠. 그땐 제가 회사에서 인정도 많이 받을 시기였는데, 갑자기 사업을 한다니까 어머니께서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집안의 가장인 큰아들이 사업하다가 망해서 굶어 죽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에 집식구도 이혼하자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그때 제가 어머니께 “걱정하지 마시라! 뭘 해도 내가 하겠다!”라고 얘기를 했어요. 사실 사업을 하겠다고 말을 했을 때 저는 이미 다 계획을 하고 있었어요. 30대 들어가자마자 계획을 잡아가지고 실행했으니까. 집식구한테도 “내가 당신한테 돈 벌어오라는 소리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렇게 말했어요. 진짜 우리 집식구는 돈 한 번도 안 벌어봤어요. 이날까지 살면서 내가 그 약속 지키느라고 무지 애썼어요. 다행히 운도 잘 맞아서 잘 됐지요. 잘 돼서 돈도 많이 벌었어요. 92년도 당시에 1년에 한 10억 정도 벌었으니까 어마어마했죠. 그때 많이 벌었어요. 한 3년 정도 하면서 거의 한 40억 정도. 만약 직장 생활했으면 400만 원도 못 모았을 텐데.

남다른 준비 과정을 거치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준비하셨는지요?

오랫동안 준비를 했어요. 제가 30대가 되자마자 계획하고 공부했어요. 직장 다닐 때도 365일 중에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어요. 일 끝나고 나면 신설동 국립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다가 집에 들어오면 12시가 넘고, 그렇게 해왔죠. 그렇게 준비를 줄기차게 해오다가 92년도에 실행에 옮긴 거죠.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는 게 뭐 돈을 준비한다던가 그런 게 아니라 계획을 짠 거죠. ‘내가 어떤 품목을 하면 되겠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는데, 그때 정한 품목이 잘 맞아서 돈을 좀 많이 벌었어요. 

어떤 종류의 사업이었는지요?

서울에 ‘한국정밀기계통상’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어요. 기계를 제조하는 업체에서 기계를 받아다가 판매를 하는 사업이었어요. SK라든가 대우중공업이라든가 여기 국일프레스라든가 이런 데에서 나오는 모든 기계를 저희가 국내에 판매하고 해외로 수출하는 시스템이었어요. 
저희의 성공 비결은 딱 하나였는데 바로 ‘신뢰’였어요. 신용을 지키기 힘든 시기였어도 저는 무조건 신용을 지켰어요. 일단 벌면은 몽땅 다 현금을 주고 샀어요. 제가 뭐 담보가 있었겠어요? 집도 남들이 인정도 안 해주는 조그마한 거 하나 갖고 있었는데. 그래서 모든 시스템을 현금 시스템으로 돌렸어요. 대기업에서도 저희가 현금을 주니까 물건을 바로 줬던 거죠. 사실 현금 결제 시스템을 만든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 걸 알기에 그 시스템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겠나 그걸 많이 연구했고, 결국 그걸 성공했기에 대기업에서 더 많이 밀어준 것에요. ‘여기는 주면 현금이다.’ 이런 걸 밝혀주는 거죠. 그렇게 돈이 돈을 번 것에요. 그러면서 여기를 제가 인수하게 된 거죠.

㈜국일프레스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한 3년 정도 ‘한국정밀기계통상’을 운영해서 번 돈으로 95년도에 ㈜국일프레스를 인수했어요. 그때가 37세 때인데 좀 빠른 나이에 인수했어요. 원래 공장은 옆에 땅에 있었는데 건물이 오래되기도 하고 그래서 여기를 사서 2001년도 10월에 준공했어요. 제가 제 손으로 지은 공장이죠. 

국일정공의 전신인 ㈜국일프레스를 인수하게 된 이유
㈜국일 프레스는 어떤 회사였나요?

국일프레스는 원래가 1954년도에 창업된 회사입니다. 역사가 오래됐어요. 1954년도에 프레스를 만들었으니까 70년 정도 됐죠. 처음에 서울에서 만들어서 그다음 원효로, 그 후에 인천 제일제당 뒤쪽으로 이전해 왔어요. 여기는 원래 인천 주물공장이었어요. 사실상 3공장. 본사는 독산동에 있었는데 목돈 들여서 다 정리하고 이쪽으로 내려온 거죠. 아무튼 오래됐습니다. 한 70여 년 정도 역사를 가진 그런 회사죠. 프레스 기계 제조회사로서 선도적인 역할을 했죠. 

국일프레스를 인수한 후 회사명을 ‘국일정공’으로 정한 이유가 있는지요?

95년도에 국일 프레스를 인수, 합병하면서 상호를 ‘국일’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하고 ‘프레스’를 ‘정공’으로 변경했어요. 품목은 프레스인데 상호만 국일정공으로 변경한 거죠. 정공은 정밀공작기계를 의미해요. 프레스라는 단어가 익스프레스(이삿짐센터)를 의미하는 것 같아서 듣기에 좀 그래서 정공이라는 말로 바꾼 거죠. 그리고 원래 프레스기는 스테핑 강한 힘으로 철판을 쾅 하고 찍어서 가공하는 방식
이라고 찍어 누르는 거거든요. 금형이 있고, 프레스가 있긴 하지만 우리는 기계를 만드는 회사니까 좀 더 다양한 기계와 다른 품목을 좀 더 뽑아야 되겠다 해서 정밀공작이라는 상호로 바꾼 거죠. 그래서 지금도 괄호치고 프레스를 써요.

국일프레스를 인수한 이유가 있는지요?

프레스 이거는 어떻게 보면 기초 기반 산업이에요. 이 기계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러니까 역사에 따라서 없어지는 기계가 아니고 산업화에 따라 가지고 10년이고 20년이고 100년이고 꼭 필요한 게 프레스에요. 
자! 보세요.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가전제품인 세탁기, 컴퓨터 케이스 이게 다 프레스로 찍어내는 거예요. 플라스틱은 사출기가 찍는 거고. 근데 플라스틱은 깨지죠? 쇠는 찌그러질망정 깨지지 않아요. 철은 재생돼요. 녹여서 다시 만들죠. 근데 플라스틱은 환경 오염이 되고 재생률이 낮아요. 그러니까 기계 산업에서 특히나 프레스는 없어서는 안 될 기계죠. 자동차도 영원히 만들어야 될 거 아니에요? 소모품이니까. 숟가락, 젓가락도 만들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게 다 프레스로 찍는 것에요. 
프레스 기계는 제가 기업을 했을 때도 샀던 거고 여기서도 구매해 봤는데, 공부하다 보니까 기초 기반 산업으로 프레스가 없으면 안 되는 걸 알게 된 거죠. 자동차 가전, 선박, 컴퓨터, 항공에 이르기까지 프레스 기계는 없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레스 산업은 단시간 내에 끝나면서 모델이 변경될 게 아니고 기술 개발로서 유지가 될 것이다. 이 생각을 했던 거죠. 프레스는 생명력이 길 것이다. 그러니까 롱롱 타입인 거죠. 
해마다 프레스 생산 속도가 빨라진다든가, 안전장치가 2단, 3단, 4단으로 바뀐다든가 하는 기술 개발은 되고 있어요. 이렇게 바뀌면서 오는 거죠. 이런 것이 사전에 감지가 됐던 부분들이고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거죠. 그래서 인수에 달려든 것이죠. 

30년 여년 간 흔들림 없이 국일정공을 운영해 오다
국일정공 운영 초기에 일이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저는 회사를 일구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어요. 정말이에요. 우리 아이들 키우면서 같이 찍은 사진을 찾아보니까 10장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아이 어렸을 때 거의 회사에서 잤어요. 회사에서 먹고 자고 퇴근을 안 했어요. 여기서 집이 7분 거리인데도 안 갔어요. 제가 우리 막냇동생을 데리고 있을 때, 걔가 집에 가서 속옷을 가져오고 그랬어요. 일하다 보면 뭐 새벽 1시, 2시 되면 그냥 회사 소파에서 자고 정말 그랬어요. 거의 한 5~6년 그렇게 했죠. 초창기에는 하루에 제가 1,000km도 뛰어 봤으니까. 운전을 1,000km 뛰려면 어떻게 뛰어야 하는지 알아요? 여기서 출발해서 대전 갔다가, 대구로 해서 부산 갔다가, 저쪽 목포로 건너가면 돼요. 진해로 해서 이렇게 해서 광주에서 올라오면 청주입니다. 그렇게도 하루에 다 뛰어 봤어요. 그래도 즐겁고 재밌었어요. 

97년도에 대한민국 경제가 상당히 어려웠는데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어휴, 안 좋았죠. 당시에 부도가 안 날 수가 없어요. 막 줄줄이 터지는데 뭐 저라고 안 터져요? 제가 IMF 때 부도 맞은 것만 해도 한 25억 이상 받았죠. 그때 당시 유가증권이 다 휴지 조각이 된대. 그건 아마 방송에도 한 번 나왔을 거예요. MBC에서 우리 회사 취재를 했는데, 이거를 극복하는 과정을 취재하면서 우리 회사 부도난 수표를 보여줬어요. 그걸 보더니 놀래요. 이러고 어떻게 회사가 살아남았냐고? 그만큼 준비하는 거죠. 가지고 있는 것만큼. 터질 것만큼. 그러니까 그런 거를 준비하는 자세,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으로 가는 거예요. 
옛날부터 쭉 경기를 살펴보면요, 우리나라 경기는 삼한사온이 와요. 기후하고 똑같아요. 그러니까 한 4년 동안 좋으면 3년 동안은 아주 안 좋아요. 이렇게 쭉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는데 이렇게 가파르게 올라가죠. 이건 대한민국이 근대화와 산업화가 63년도에 시작되면서 쭉 올라온 역사를 딱 들쳐 보면 나와요. 언제 좋았고 언제 나쁘고. 그래프를 보면 이런 식으로 나와요. 대한민국은 원부자재가 풍부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국제 경제 위기를 같이 겪어요. 몸살을 앓는 거죠. 미국에서 기침 한 번에 우리는 드러누워요. 자원이 부족한 나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스템을 보면서 항시 위험에 대비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거죠. 적군이 나타난다고 총을 다 쏴버리면 나중에 정말 나타날 때 못 쏘잖아요. 그렇죠? 내가 쏠 만큼은 갖고 있어야지 상대편 장군이 나타날 때 쏠 총알도 남겨놔야겠죠.
기업한테 총알은 바로 현금이에요. 기업은 돈 없으면 무조건 죽습니다. 피 같은 게 돈이에요. 우리 몸에 피가 없으면 죽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기업도 돈이 없으면 하고 싶은 것을 못 하죠. 그런 거를 사전에 준비하고 가는 거죠. 

그럼 IMF 때 인원 감축이나 월급 삭감과 같은 정책을 시행하셨는지요?

아니요. 저는 인원을 한 명도 안 줄였어요. 월급도 한 번도 안 깎아봤어요. 당시에 직원들이 “나라 경제 상황이 그러니까 월급을 반납하겠다.” 말했지만 제가 그때 “반납할 만큼 마음이 있다면 그만큼 일 더 해라!”, “여러분이 100%에 대한 능력을 갖고 있는데, 반납하고 70% 80%를 유지할 거면 반납이 아니다! 반납하지 말고 120% 발휘해라! 그게 도와주는 거다!”라고 말하면서 안 줄였어요.
논리적으로 그렇잖아요. 가정에 100원 갖다주다가 80원 갖다주면 기분 나쁘잖아요. 집안 살림이 안 된다니까요? 근데 남편이 100원 갖다주고 일 조금 더 하면 “아유, 당신 고생했네. 내가 당신 고기라도 한번 사줄게.” 이렇게 되죠. 사전에 준비하고 맞춰나가다 보니 저는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일어났을 때나 IMF 시절 다 나름대로 잘 겪어왔어요. 자동차가 왜 방어 운전해요? 나 혼자는 아무리 가도 사고 안 나는데, 딴 차가 와서 들이박을 수 있으니까 사고 안 나게 하려고 속도를 빨리 낸다든가 늦추든가 하는 거죠. 사전에 견제하고 가는 거죠. 기업 운영도 방어 운전하는 거랑 똑같은 거죠.

그러면 당시에 사장님도 직원들과 같이 회사에 남아 일을 하셨겠네요?

그럼요. 저는 지금도 회사에서 밤 11시 전에는 안 나가요. 여기에 11시까지 있습니다. 직원들 다 퇴근시키고 11시나 12시까지 회사에 있어요. 집에 가면 뭐 해요? 일찍 가봐야 밥 먹고 TV 보고 과일이나 깎아달라고 하겠죠. 저는 절대 안 그래요.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 계시는 이유가 있는지요?

저는 아침을 안 먹어요. 군대 제대 후 지금까지 아침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점심 저녁을 먹거든요. 근데 점심은 회사에서 먹어요. 저녁은 먹고 들어가요. 집에서 밥 먹는 게 한 달이면 한 두세 끼 정도. 한 11시까지 회사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퇴근합니다. 여기에 모든 게 다 있으니까. 저는 직원이 없어도 돼요. 제 사무실에 30년 치 모든 자료가 다 있어요.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제가 직접 찾아요. 내가 2000년도에 뭐 했지? 그럼 2000년도 거 보면 돼. 찾으면 나오니까 다, 1년 치가 다 나와요. 내가 볼 수 있는 자료는.

그러면 언제 무엇을 하면서 쉬시나요?


제가 취미가 따로 없어요. 술도 안 마시는데 친구가 뭐가 있겠어요? 친구들이 저를 돌같이 봐요. 저는 일 년에 딱 1번 동창회에 가서 친구를 만나요. 거기서 만나면 끝이에요. 동창들 사이에서 저는 좀 독특하죠. 제가 사업을 일찍 시작하다 보니까 놀지를 몰라요. 오직 운동만 쫓아다니는 거죠. 
가끔 시간이 나면 산에 가요. 제가 그러는 이유는 ‘어쩌면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나?’ 하는 생각 때문이에요. 조용히 시간을 갖고 설계를 하죠. 산도 2개, 3개 타는 게 생각하면서 타는 거예요. 건강도 생각해서 산에 가는데 누구하고 같이 가지 않고 혼자서 타고 돌아와서, 내가 생각했던 이런저런 생각들을 메모하고 그러면서 시작하는 거예요. 주로 토요일에 일어나 가지고 청량산, 문학산, 월미산 이렇게 세 군데 산을 돌고 회사로 들어와요.

직원 복지의 꽃을 피운 회사 경영철학
허투루 소비되는 시간에 엄격하신 것 같은데 하루를 보내는 대표님만의 철칙이 있는지요?

저는 계획을 하고 그 계획에 맞게끔 움직여요. 지금도 그렇지마는 시간이 모자라요. 아침에 5시부터 눈 뜨기 시작하면 저녁 12시까지 시간관념을 2시간으로 잘라요. 2시간 넘는 건 잘 안 해요. 2시간 단위로 잘라서 합니다. 2시간이 지나면 다른 걸 해야 해요. 그것만 할 수 없잖아요. 쉽게 얘기해서 골프 치러 간다 하면 6시간 정도가 필요하거든요. 오고 가고 라운딩하고. 그럼 2시간 법칙 이걸 못 해요. 6시간을 거기다 어떻게 쏠 수 있겠나? 정말 이거는 아주아주 시간을 잘 내서 쪼개서 가면 가도 자주 못 합니다. 그래서 별로 안 하고, 주말에만 조금 시간을 내죠.

그럼 운동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회사 내에 체육관을 세우신 건가요?

예. 맞아요. 제가 워낙 운동을 좋아해서, 운동 좋아하는 직원들도 쓰라고 체육관을 지어놓은 거예요. 2002년부터 열어 놨으니까 올해가 22년 되었네요. 그런데 우리 회사 직원들만 사용하게끔 하지 않고 지역 주민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게 열어놨어요. 혼자 쓰기 아깝잖아요. 여기서 시합이나 체육 관련 행사가 많이 진행됐어요. 국일정공 실업 농구팀 2003년에 창단된 인천지역 유일 여자 실업 농구팀, 2018년 제99회 전국체육대회에서 동메달 획득을 끝으로 해체
도 운영해서 실업팀 농구대회도 하고. 그리고 족구장도 2개 만들어서 점심시간이면 족구하고 배구하고 리그를 하는 거예요. 월말 되면 우수 부서에다 시상해서 회식하게 만들어주고 그랬죠. 요즘은 주말에 초등학생인 손녀딸이 와서 체육관에서 같이 운동도 하고 그래요.

체육관 외에 직원 복지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부분이 있나요?

일단 저는 우리 회사 여직원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해요. 여직원들 커피 심부름, 청소 이런 거 전혀 못 시켜요. 저부터도 안 시켜요. 여직원들 출근해서 아침 커피 타고 청소해 주는 문화를 싹 없애버렸어요. 라디오 방송 제목처럼 요즘은 여성시대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현재 직원 수가 예전보다 줄어든 이유가 OEM이 늘어서 그래요. 옛날에는 저희가 다 생산했는데, 지금은 중요한 부품을 받아서 조립만 해요. 예전 직원들이 나가서 부품을 생산하는 회사를 차릴 수 있게 도와주죠. 그들이 생산한 부품을 OEM으로 사서 오는 방식이에요. 그거야말로 직원들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장기 근속자들이 많은가요?

다 오래됐어요. 우리는 대부분 장기 근속자들이에요. 보통 20년, 30년. 다 공신들이죠. 제가 좀 못 돼서, 예전에 잘못한 직원한테 주먹도 날려봤어요. 당시 직원 중 한 명이 월급받아서 술 먹고는 집에는 쥐꼬리만큼만 가져다줬다는 거예요. 보너스를 줘도 보너스 안 나왔다고 거짓말하고. 그래서 그 직원 부인을 오시라고 해서, 부인 앞에서 때렸지요. 부인이 놀라더라니까! 그때 제가 부인한테 월급 통장을 직접 주고는 남편 주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 이후로 회사 직원 부인들이 정말 좋아하면서 저한테 이르는 거예요. 자기 남편이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술 먹고 늦게 들어가면, 다음날 출근해서 일하다가 자칫 사고 날 수도 있거든요. 그렇게 직원들을 관리하다 보니 직원들이 장기 근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직원뿐 아니라 직원의 가족까지도 챙기셨는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더 있을까요?

예전에 우리 회사에서는 1박 2일로 야유회도 가고 그랬어요. 우리 회사는 조금 특수한 회사라 가지고요. 제가 인수하기 전에 회사는 군 체제였어요. 우리 총무부장도 원스타 출신이었어요. 별 하나. 국일프레스 당시에 아침에 구보도 하고 그랬어요. 여기 공단을 다 돌았어요. 
제가 인수해서는 산정호수에 가서 극기 훈련도 했어요. 산정호수에 직원들 데리고 다녀오면 목이 다 쉬어서 오고, 얼굴은 시커멓게 해서 집에 가는 거예요. 그때 부인들이 남편들을 보면서 1박 2일을 가서 도대체 뭘 하고 오는지 궁금해하고 그랬어요. 제가 훈련 3년 차가 됐을 때 가족들을 동반해서 간 거예요. 가서 보니 이게 말도 안 되는 거야. 새벽 6시 일어나서 웃통을 벗기고 뜃기고(뛰게 하고), 산꼭대기까지 뜃기고 올라가는 거. 마치 어디서 군대가 온 것처럼. 그렇게 올라가서 그다음 뭐하냐면 단체 축구! 볼 한 세 개 집어넣어 놓고 양쪽 갈라가지고 골대에 집어넣고, 바로 전투 축구죠. 볼 하나만 갖고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이 볼, 저 볼 차는 시합인 거죠. 그리고 또 웃통 벗고 내려와서 저녁에 캠프파이어를 해요. 근데 음악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때 자동차를 갖다 대고 문짝 4개를 다 따요. 그리고 거기다 카세트! 그거 틀어놓고 춤추고, 아, 잘 놀아요. 술 안 먹어도. 술 안 먹어도 아주 그런 거 무지하게 좋아해요. 성격이 내성적인 성격이 아니라 가지고.

열정적인 에너지가 닿는 곳 그리고 은퇴 후의 삶에 대하여
내면의 에너지가 남다르신데, 요즘은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나요?

제가 술 안 먹는 모임을 하나 하고 있어요. 술 대신 커피 마시면서도 진실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매주 수요일마다 여기 3층 직원 식당에서 수요 포럼을 해요. 외교, 안보, 국방, 경제 그리고 다양한 사회 이슈들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모임을 하나 운영하고 있어요. 어제도 진행했는데, 지금까지 132회째 진행하고 있어요. 외부 강사는 안 부르고 거의 제가 혼자 진행합니다. 지인들이나 체육인들이 와서 듣는데 132회 중 120회는 거의 제가 강의했어요. 동행 포럼이라고도 하는데 메인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사람들’이에요. 줄여서 ‘아세사’인데 국가하고 동행하겠다는 의미의 포럼이죠. 수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해요. 거의 3년 다 돼가죠. 지난번 100회째는 무지하게 많이 모였죠. 우리 체육관에서 했는데 100회 기념으로 대통령실에서도 내려왔어요. 정책 강의도 해주고, 대통령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말해주죠.

매주 포럼도 진행하고 인천기계산단 관리공단 이사장 역할도 하느라 많이 바쁘실 것 같습니다. 혹시 국일정공을 이어갈 후계자를 양성하고 계시는지요?

아니요. 후계자 없어요. 저는 계집애 하나, 딸 하나 있어요. 그러니까 딸 둘. 그런데 그 두 딸이 지 아버지가 하는 사업에 관심이 없어요. 관심을 두라고 그랬는데 젊은 애들은 자기 일을 하려고 하더라고요. 만약 제 일에 관심이 생기더라도 여자들이 하기 힘든 일이라 물려주지 않을 것 같아요. 전문경영인이 있다고 하면 전문경영인한테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꼭 내 식구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은 안 해요. 이 국일정공도 제가 인수받았잖아요. 2세한테 물려준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와서 더 잘 만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 카면 일할 수 있게 해야죠. 저는 저 혼자 이걸 해서 내가 다 끝까지 마무리해서 내 핏줄에게 이어준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은퇴를 생각할 연배가 되신 것 같은데, 은퇴 후의 계획이 있으신지요?

은퇴? 저는 여행을 하고 싶어요. 캠핑카 하나 사서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한번 돌아다녀 보고 싶어요. 왜냐면 다녀본 곳이 없어요. 옛날에 속리산에 갔었는데 오래됐어요. 그래서 캠핑카 하나 사서 저 혼자서 하루에 두, 세 군데 다니며 점심 먹고, 저녁 먹고 그렇게 하려고요. 캠핑카에 있으면 좋거든요.

회사나 사회에 이바지하는 바가 너무 커서 다른 분들이 안 놔주실 것 같아요.

제가 잘 가르쳐서 다음 세대가 잘할 수 있게끔 뒤에서 자문도 해 줘야죠. 땅속에 묻히면 끝이니까 제가 가진 거 다 주고 가야죠. 무조건 주고 가야 됩니다. 뭐든지 주고 가야 후세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네.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위해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민기록일지

* 면담일시 : 2024년 6월 27일 11시

* 면담, 원고정리 : 정지선

* 면담지원 : 허은영, 박인옥, 양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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