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어렸을 때… 중앙도자기 안 다닌 사람이 없었어요” _한기순
안녕? 신기촌 사람들
작성자 양지원 게시일 202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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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렸을 때
중앙도자기 안 다닌 사람이 없었어요


 

구술자 : 한기순(68, 1952년생, 논산출생, 새마을금고 이사)
 
- 채록일 : 2019711
- 채록장소 : 신기시장 인근 카페
- 채록자 : 이경희, 이명순, 조영숙
 
 
 
여기서 태어나셔서 계속 사신 건가요?
태어나지는 않고요. 제가 20대 좀 못 되서 부터 주안8동에서 살았어요. 주안8동이 어디냐면 화장터 옆에옛날 화장터가 있었어요. 그 옆에서 아가씨 때부터 살아가지고, 제가 결혼을 그 자리에서 했지요. 하고서 8동에서만 얘들 학교 다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다 보내고, 7동에 이사 온지는 4~5년 좀 안됐어요. 워낙에 활동을 7동에서, 직장이 있고 해서 더 오래 했지요. 하다 보니 주민자치위원도 7동에서 했고. 부녀회나 재향군인회 여성회는 8동에서 좀 했고. 그렇게 하다가 거기서 다 정리 하고서. 제가 어디서 살았냐하면 한신아파트 밑에 보면 텃밭 하는 데가 있어요. 진흥아파트 뒤에.
 
그때가 몇 년이에요?
거기는 우리 아이가 5살 때. 화장터 옆에 살다가 72년생 우리 아이 5, 6살 되었을 때 이사를 갔어요. 몇 년인 거는 확실히 모르겠는데 거기서 반장 일을 오래 봤어요. 우리 아이들 문학초등학교 다니고. 문학초등학교 졸업하고. 또 지금 47, 48살 연년생 아이들이예요. 그렇게 살다가 이제 거기 텃밭 거기 다 토개공에서 정리하면서 보상받아가지고 아래로 내려오게 된 거에요, 산동네 살다가. 오래 살았어요. 40년 살았지요.
 
한신아파트 있는데, 그 뒤에 보다 여기가 집값이 더 비쌌어요?
여긴 비싸지요. 현재도 비싸지요. 한신아파트 위에는 산동네니까. 유아원 바로 그 위엔데 산동네니까 공기 좋고그러니까 거기 오래 살았고. 우리 친정이 거기 화장터 있고, 중앙도자기 있고, 중앙도자기 나가면서 쌍용아파트 짓고, 쌍용아파트 짓고 진흥요업이 생기면서 중앙도자기가 진흥요업이 생기면서 요업은 쌍용아파트를 좀 차지했어요.
 
52년생이시면 저보다 11살이 많으세요. 50대 후반 저 또래인지 알았어요. 그런데 연세가 꽤 있으셔서너무 젊으신 거예요.
사람들이 언니는 늙지도 않아 그래요. 주름살 생기려면 살이 찌고, 생기려면 찌고 주름살이 없어 지나봐 했지. 중앙도자기였을 때 화장터가 있었지. 지금 부평화장장으로 이사 갔잖아요.
 
주안8동에 오셨을 때가 몇 년도였을까요?
우리 아이가 72년생이니까. 우리 막내 동생이 양띠(67년생)인데 걔가 4살 때 왔나봐. 우리 아버지랑 모래마을에 살다가 왔어요.
 
71년도이네요. 그러면 자녀분 태어났을 때 오셨네요.
내가 처음 태어나기 전부터 살았는데 우리 아이 낳아가지고. 3,4년 다른 동네에 살다가…….
 
여기가 마을이 조성된 지는?
그러니까 중앙도자기, 화장터 있는 데로 신비마을을 넘어 다녔어요. 미원상사도 있었고. 공장이 화장터 이쪽으로 있었죠. 지금으로 말하면 광명아파트 그 쪽으로 논이 있고. 밭은 광명아파트 이후로, 지금 쌍용아파트 맞은편 농협 그 뒤쪽으로 다 양배추 밭이 있었어요. 중국사람 땅이었어요.
 
거기가 언덕이었지 않아요? 언덕을 까뭉개고 사람들이 와서 집 짓고그랬지요?
. 언덕이었어요. 쌍용아파트 정문에서 지금 농협 쪽으로 5번 종점이었었어요. 거기가 다 양배추 밭이었고, 땅이 질었어요. 다 장화 신고 다녔어요.
 
처음에는 농협 쪽이 5번 종점이었다가 종점이 두세 번 바뀌었던 거 같아요.
그렇지요. 요만큼 나오고, 거기서 조금 더 온 게 주안3동 쪽으로 나오고, 더 위에 가고 5번 종점 있는데 있다가 주유소 있는데 있다가, 좀 아래로 인하대 쪽으로…….
 
이제 어렴풋이 기억나네요.
여기 살으셨더랬어요?
 
저는 신기촌에 살았어요.
저는 그쪽에서 많이 살았어요. 진흥요업, 중앙도자기. 5일마다 중앙도자기가 월급날이었나 그랬어요. 요쪽 길로는 시장이 남부상가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어요. 신기시장도 쭉쭉 되어 있고, 별로 활성화가 안 되었을 때예요. 나중에 중앙도자기 없어지고 진흥요업 생기면서 사람들이 많이 생겼어요. 진흥요업 사람들이 많았잖아요.그러니까 그 사람들 월급 타면 시장이 좀 되고 그랬죠. 제주도 같았어요. 오히려 중앙통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녔어요. 중앙로 지금 시티은행 맞은편 체육사 그 골목으로 사람들이 많이 다녔고 제주도같이 외졌지요. 그런데 쌍용아파트 생기고 진흥아파트 생기고 하면서 여기 남부상가가 활성화가 되었지. 그래서 이 길이 그쪽보다 더 활성화됐지.
 
여기가 나중에 만들어진 거고. 아까 말씀하신 데가 중앙로 말씀하신 데죠? 중앙로 쪽에 양계장 앞쪽으로 우물이 하나 있었잖아요?
거기에 우물이 있었다고, 그때는 8동에 살았으니까 잘 모르지만. 그때는 8동 화장터, 진흥요업, 중앙도자기는 확실히 알지요. 왜냐면 저 어렸을 때 아가씨도 중앙도자기 안다닌 사람이 없었어요. 남자도 웬만하면 중앙도자기 다니고. 나는 공장 다니기 싫어서 유일하게 안 다녔어. 내 동생(56년생)도 다녔어. 지금도 메어서 공장 다니는 게 싫어. 새마을금고 처음에는 파출로 시작해서 걸어서 시장 전체를 수금을 하고 다녔지. 그때가 82.
 
그러면 리어카로?
리어카는 나중에 생겼어. 처음에는 가방 하나 메고 도보로 다녔지. 토요일이면 가방을 집으로 들고 갔어. 나 혼자 집으로. 일요일엔 노니까. 우리 집에도 가지고 갔다가 장롱에 넣었다가 월요일에 입금시키고 그랬어. 그 시절엔 그랬어. 나중에 전동차가 생겨서전동차도 늦게 생겼어. 그 다음엔 내가 자전거를 탔어. 자전거를 타고 주안3, 7, 8동을 다녔어. 그러다가 오토바이를 하나 샀어. 오토바이로 수금을 다니다가 프라이드 왜건 하나를 사서……. 주안3동 새마을금고 분소장을 만들어서…….
 
그게 몇 년도?
90몇 년도. 83년 입사해서 분소장까지 하고 주안3동 명보주유소 옆에 분소가 하나 있었지. 그게 안돼서 폐쇄되면서 명퇴를 하게 되었죠. 명퇴하면서 거기 지금 우리 가게 그 앞에 동강 매운탕 있는데서 제가 가게를 8년을 했지. 8년 하면서 새마을금고 이사에 나가서 선거해서 당선이 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현직 이사지.
 
그때 시장이나 상점 도시면서 수금하신 거예요?
우리 새마을금고에서는 공제라고 하고, 보험회사에서는 보험이라고 하는데 공제를 해서 내가 인천에서 1등을 했어요. 상으로 백두산에도 가고, 태국도 갔다 오고, 싱가포르도 갔다 오고 연합회에서 다 보내줬어요. 강의도 다녔어요. 전라도 한 번 갔다 오고, 주안1, 5, 6동 직원들한테 강의해서, 지금 여자 이사장님이 전무였을 때 강의하러 갔었어요. 제가 활동을 많이 했어요.
 
주안 지금 동사무소 있는 자리 위쪽으로 사미공원 하나 있잖아요. 그쪽 일대 이야기 좀 해주세요.
주안3? 사미공원일 때는 거기 다 주택이었잖아요.
 
위쪽으로는 주택이었는데 아래는 아니지 않았나요? 주안7동 동사무소 있는데…….
그때 우리는 여기 다 동양장까지 주안3동이었어요. 82년도에 7동으로 분동되었어요. 초창기에 동장님한테 상을 받았지. 한명옥 동장님이었어요. 7동으로 와서 8동으로 분동된 거예요. 그때는 주안3, 서부동이라고 했어요. 주안3동 때부터 등본이 돼있었어요. 다음에 주안7동으로. 그때 중앙도자기, 쌍용아파트 지어질 때 83년도에 분동 되었어요.
 
여기 도로 미니 5번 버스 다니기 전에 풍경은 어땠어요?
글쎄제가 알기로는 8동에서 오래 살았지만 3동에는 살지는 않았는데. 마을금고 다니면서3, 7, 8동인데. 3동에는 5번 종점이 쌍용아파트 앞에 있다가 다방 있다가 인하대 있는 쪽으로. 3동은 동사무소 자리도 그 자리 아닌가요?
 
제 어릴 적 기억은동사무소 있던데 돌산. 학익동 돌산 말고 조그만 고인돌 같은 돌들이 몇 개가 있었어요. 그게 없어지면서 동사무소가 들어왔던 걸로…….
나는 동사무소 있을 때 왔다 갔다 했으니까. 그래서 이 길은 지금 김종린 회장님이 과일가게 하다가 방앗간 하는데 그분 가게도 끝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거기가 요지잖아요. 김종린 회장님을 3대째 알고 있어요. 우리 친정이 화장터 앞이었으니까. 우리 엄마, , 아들은 주안3동 의향소방대 총무부장 맡고, 아이들까지 알고 있으니까. 걔가 용현동이 처갓집이니까 거기서 사는데 용현동에서 지 아들이 고등학교 다니니까우리는 4대째 김종린 회장님을 알고 있지. 우리를 너무 잘 알지. 그래서 임흥락씨(52년생)가 주민자치위원장 했었거든. 임흥락 위원장님이 그분이 추천하셔서 전화했다고 했는데. 아코디언 봉사하고 다니시고. 나하고 같이 주민자치위원 일했지.
 
이 분은 지금 무슨 일 하세요? 주민자치위원회 활동을 하셨어요?
재작년까지 하셨을걸요. 시장에서 오래 되셨지. 주민참여예산위원도 하고. 우리하고 같이 일했어요. 김종린 회장님보다 더 오래 사셨어요. 아이들 쬐끄만 할 때만해도. 아이고 코를 찔찔 흘리고 있으면 아버지는? 물어보고 그랬지. 얘들 참 착하게 컸지.
 
시장사람들에 대한 기억나시는 분 있으세요?
지금도 계신 분도 있고. 그때는 집주인들이 많이 살았어요. 그럼 형님, 언니 하면서 가족같이 살았지. 돈 같은 거 벌면 나한테 다 맡기고 그랬지. 지금도 럭키마트 사장님이 상당히 까다로운 분이야. 여자 사장님인데 그분이 오라고 하면 검은 봉지에 이만큼 돈을 주고 그랬어. 가서 입금시키라고. 어떨 때는 1~2만원이 모자랄 때도있고, 남을 때도 있고 그러면 사장님 여기 얼마 모자라요 그러면 믿고 맡기고 그랬어. 그렇게 다니다보니까 신용도 많이 얻고 그러니까. 형님 보험 들어줘봐 하면, , 하루에 얼마씩 받아갈게, 하면 그렇게 주시고 그랬어.
 
그때는 통장을 수기로 쓰고 그런 때잖아요?
수기로 쓰고 그랬어도 다 믿고. 제가 나쁘게 마음먹었다던가 하면 다 늙고 죽고. 지금도 신기시장 사람들하고 잘 지내고 그래요. 먹는 거 있으면 고구마도 내놓고 감자도 내놓고. 마을금고 아래 직원부터 분소장까지. 동네 사람들 하고 화합 같은 것도. 그때는 하루하루 일수를 찍었어요. 일수 적금 말고도 통장 가지고 가고 이튿날 가지고 가고. 나름대로 내가 적고. 믿고 주고 그랬지. 지금도 주인이 하는 데는 얼마 몇 집 안돼요. 찬수네 그 앞에 신신정육점, 지금은 몇 집 안 돼. 노점이고 뭐고 주인이 다 했지. 기억이라는 건 이리와~ 들어와 먹고 가~ 그런 인심 같은 거? 지금도 마찬가지야. 그냥 지나가면 뭐라도 하나 있으면 야채 같은 거 가지고 가~ 하고. 정답게 살고.
 
여기 8동에 살았을 때, 7동에서부터 신동아아파트 그 밑에까지 철거민들이 온다고 했을 때는요?
여기는 만석동 만석부두에서 많이 왔어.
 
그때 철거민들이 여기 와서 산다고 했을 때, 거주자들의 분위기는 어땠어요?
그때는 철거민들이 이쪽으로 많이 왔어요. 8동 같은 데는 원주민들도 많았고, 외주에서 이사 온 사람들도 많았고. 조옥형 구의원도 했지만 통장도 했었어. 그 분이 우리 엄마, 아버지도 많이 알았어요. 지금도 진흥아파트에 살고 계셔. 양배추 밭 있을 때, 지금 농협자리가 가게고 그 밑에 빌라가 살림집이야. 연세가 78세고, 2대때 구의원도 했어. 지금도 부평 쪽으로 직장 다니셔. 상가 관리하시는데 뭐.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요.
 
구의원 하셨을 때 이쪽에 관련된 이야기 들어봐야겠어요. 주안7동에는 박옥균(1,2), 이영재씨도 했었고. 80년대, 90년대 이렇게 되면서 많이 바뀌었잖아요. 시대상황에 맞물려서 궁금한 것도 있고, 자료를 만들려고 하는데지금의 주안3, 신기시장, 길 건너 주안7동 동사무소 공간에 살고 계신 분 소개해주실 분 있으세요?
김종린 회장님이 오래 살았고, 임흥락 회장님은 건어물 가게를 했고…….
 
임흥락선생님께 연락을 해봐야겠어요. 진흥요업(중앙도자기)3교대가 아니라 2교대 했었나요? 교대시간이 언제였을까요?
8시부터 8, 맞교대. 1, 2공장에서는 맞교대하고. 12시간씩. 식사는 한 끼 주고 잔업 할 때는 크림빵 주고.
 
어떻게 12시간 일하면서 한 끼만 주고 그랬을까요?
옛날엔 그랬어. 크림빵도 잘 준거지.
 
우리 엄마도 거기서 일했는데그렇게 고생한지 몰랐지.
휴식시간이나 있었나. 에구 그래서 우는 거야?
 
지금 같아선 못했을 거야. 은행권 다닌 사람들은 최고로 쳤지.
우리 아들도 군대 가기 전부터 영진상고 나와서 부평4동에서 했지. 전동차 모델이었지. 거기서부터 해서 퍼졌지. 그 전동차 생기고도 나도 몇 년 다녔지.
 
떠나시라고 하면 못 떠나실 것 같아요?
한신아파트에서 살 때 토개공에서 보상을 받았을 때, 서구 가좌동 미나리깡 있는데 입주권을 준다고 했어요. 저는 신기촌에서 뿌리박혀 살아서 싫다고 했어요. 사람들한테 정이 들어서 저 입주권 대신 천만 원만 주세요~ 했어요. 지금 사는 집이 이영재씨라고 주인이었어요. 우체국 취급소였어요. 주안7동에 박옥균 구의원님하고 1대인가 2대인가 같이 했지. 10년 전에 그 집을 사서 이사 온 건 4~5년 됐어요. 3, 7, 8동은 지금도 통장들 많이 알지. 예전에 2억 몇 천을 보상을 받고, 입주권 대신 1,000만 원 더 받아서 그걸 보태서 샀지. 진짜 신기촌 떠나기 싫었어. 지금 이 가게 엄마도 내가 마을금고 다닐 때부터 알고 있었어. 사람 미운 사람도 왜 없겠어. 그래도 또 며칠 지나면…….
 
시장의 변화도 많았겠어요? 마을 활동 같은 거 기억나시는 거 있으세요?
가서 사귀고 혼자서 먹으면 얼마나 먹겠어. 먹는 것도 돌아가면서 팔아주고. 미디어 축제도 제가 간사일 때 했고. 불우이웃돕기 김장, 꽃 가꾸기, 구청에서 요구하는 교육이라던가. 주민자치위원회 교육도 두 번이나 받고 수료증도 받고. 통두레 같은 거는 임흥락씨랑 마을금고 지하에서 같이 하기도 했지. 1회 때라 종이로 계획 짜고 그랬던 거 같아. 워크샵 같은 거. 미디어축제 때는 남부 초등학교에서 음식 같은 거, 해서 해 마다 김장봉사하고. 주민자치위원회 간사니까 다 해서 각 가정에 나눠 드리고.
 
신기시장 주변에서 발전해야 할 거라 던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변화라면 신기시장이 5개로 나눠져 있잖아요. 신기시장이 다 합쳐야 된다고 생각해요. 서부시장, 남부시장, 중앙시장을 통합해야 발전 있게 해야 되요. 여기가 남부시장이고, 서부시장은 위쪽에 있고, 중앙시장은 체육사 앞으로 있고, 제 생각에는 통장으로서 생각하기에는 이렇게 다 분해있지 말고 통합해서 신기시장으로 알게 해야 한다. 현재는 이름이 네 개지. 제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상인회가 각각 다르고모여서 해야 할 일은 같이 하겠지만 남부시장이나 신기시장은 이권이 있다지만 서부시장이나 중앙시장엔 그런 혜택도 없는 거 같아. 시장도 잘 되는 쪽이 있는 거구. 자기네끼리는 친목회가 있겠지만 상인회가 잘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큰 도로면에 개울천이었니까 물이 흐르고 그랬잖아요. 복개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은 어떠세요?
정창규 시의원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게 타당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요새 주민들이 지역을 생각하는 마음은 어떤 것 같아요?
주안 7동 같은 경우에는 불평불만이 없는 편이라 서로 어우러져 사는 옛날 정서가 많은 것 같아. 어제도 17통장님이 남자분인데 봉지를 내미는데 텃밭에 심었다고 주는데. 텃밭이라 봤자 옥상에 조금 심은 거겠지. 나는 참 정겹게 느껴지더라고. 난 어디서나 잘 얻어먹지만 주민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서로서로 생각하면서 사는 것 같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나눔이 있고, 우리가 있고오늘도 어르신이 무릎이 아프셔서 바로병원 다녀왔는데 우린 아직은 그렇게 살아보질 않아봐서. 어제도 6시 반에 오라고 해서 갔더니 미꾸라지 탕을 끓여서 잘 얻어먹고 일찍 집에 가서 자고. 여러 가지로 참 좋아. 많고 적고, 못살고 잘 살고가 아니라.
 
옛날에 철거민들이 와서 정착해서 살고 여전히 10평짜리에서 사시고요.
10평짜리 집이지만 늘려서 쓰고, 그냥 사시는 분이 계시고. 그래도 시장도 많이 개발했잖아요.
 
주차장이 더 있어야 할까요?
신기시장은 잘 해놨잖아요. 남부시장은 요구가 많아요. 지금 생선 집(우리 앞)까지 9채인지 요구하는 거 같아요. 김난영 구의원 네집까지 되어 있어서 추진 중인 거로 알고 있어요.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봉투 집, 생선 집 그 앞으로 몇 집. 그 생선집하고 봉투 집은 반대하는거 같아요. 시하고 구하고 논의 중인 것 같아요. 남부상가 총무님 밖에 계시네.
 
작성하면서 궁금한 거 있으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고향은?
도움이 된다면 뭐든지. 고향은 충남 논산이에요. 10대 때 가족들과 같이 올라왔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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